영광의 왕, 여호와 ! /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Jun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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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왕, 여호와 !         

                                                                                   산들바람


                  1. 전쟁의 하나님과 평화의 하나님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중심부인 뉴욕에서 비행기를 이용한 자살테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부와 힘을 상징하듯 거대한 자태를 뽐내며 우뚝 서있던 쌍둥이빌딩을 민간항공기로 돌진하여 폭파시킨 이 사건은 전 세계의 넋을 빼앗아 놓았습니다.

사건 후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리스트들은 반드시 응징되어야 한다며 즉각 ‘거룩한 전쟁’을 선포했고, 미국과 한국의 보수 개신교 목사들이 앞을 다투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등의 호전적인 제목의 설교를 쏟아냈습니다.

 백악관에서 하루 일과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친다는 미국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하는 그들의 설교는 확신으로 가득 찼고 국경을 초월하여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당시 설교자들이 주로 인용한 성서 구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무엘상 17장 47절)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편 24편 8절, 이상 개역성경)


위의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다윗의 고백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자는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싸울 때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당당하게 맞서 외친 말입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다윗은 골리앗을 물맷돌로 거꾸러뜨렸습니다. 평생을 이웃국가와의 전쟁으로 보낸 다윗은 시편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하며 찬양했습니다.


이 본문들이 다윗의 실제 고백인지를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의 실존과 성서에 기록된 그의 언행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가 인식한 하나님이 삼천년 전의 원시신관에 철저히 머물러 있었다는 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서서 몸소 싸우는 신, 적을 모조리 잡아들여 자기가 돌보는 민족에게 넘겨주는 신은 당시 팽배해있던 종족수호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비호를 받아 평생에 걸쳐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승전을 기록하고 이스라엘을 당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다윗은 마침내 자신의 수호신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이렇게 호전적인 성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함께 반영하고 있기에, 기독교는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진 난해한 종교로 우리 교우님들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갈등과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가 민족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장 4절, 공동번역)

이사야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내다보며 전쟁이 영원히 사라진 지구마을의 평화를 꿈꾸었습니다. 왕과 사제들과는 대척점에 서서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에게 희망과 위로를 선포한 고독한 예언자는 다윗이 고백한 강하고 능하신 전쟁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평화의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2. 기독교 성서의 두 얼굴


이렇게 성서는 매우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이점을 애써 부인하며 성서의 일체성과 완전성을 주장하는 보수 해석자들은 평화의 도래를 위한 중간 단계로 어쩔 수 없는 전쟁의 시기가 있노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평화의 도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전쟁’을 선택하는 전능자의 전투방식은 여전히 잔인하고 유치하며 편협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성서에 나타납니다.

우리 기독교성서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은 그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벽하고 논리 정연한 책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겪어왔던 치열한 삶의 현장과 갈등, 또한 그들의 어리고 유치하며 이기적인 시각까지 너무나도 솔직하게 담아냈기에, 그들의 한계와 욕심, 앞과 뒤가 다른 오류와 혼란도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가진 오류와 한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성서를 그냥 하늘에서 주신 완전한 경전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모순과 어린 시각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삼천 년 전의 원시신관에 그대로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오랜 옛날 다윗이, 또한 성서기자가 이해했던 원시신관을 그대로 갖고 살아가는 21세기의 현대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랍고도 슬픈 일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입니다. 현충일(6일)과 한국전쟁 발발일(25일)이 함께 들어 있어 그런 별명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이 한 달 동안 전쟁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그 날을 잊지 말자.”고 외치는 호전적인 설교가 소위 복음주의교회를 자처하는 한국 교회 강단에 쏟아질 것입니다.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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