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기자들이 이해한 예수 /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Sep 2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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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돌아가시고 4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 지역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지 20년쯤 지난 서기 70년 경, 예루살렘과 갈릴레이 지역에서 전해지던 예수님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삶의 이야기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한 사람들이 마침내 뜻을 이루었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전승 과정을 거쳐 기록의 단계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40년간 내려온 수많은 전승들 가운데 서로 다르거나 모순되는 자료를 접했을 때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그 진위를 가려내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자료는 그의 영웅담에 치중한 나머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료는 영웅적이기는 커녕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평범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자료들이라도 대중의 공감을 얻는 내용은 기록에 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글이 거룩한 책으로 편집될 뿐 아니라 후에 ‘성서무오설’이라는 교리의 보호(?)를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모순되는 자료를 함께 싣는데 갈등을 느낄 필요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출판기술이 없었던 당대에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복사본을 만들 수밖에 없었기에, 비의도적인 실수도 있었고 복사자가 의도적으로 내용을 바꾼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축자영감설을 믿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에 있어서는” 성서에 오류가 없다고 믿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마침내 전승 자료들이 기록물로 모아져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들이 탄생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네 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요즘 널리 알려진 <도마의 복음서>를 비롯하여 <마리아의 복음서> <베드로의 복음서> <빌립보의 복음서> 등 여러 복음서가 존재했으나, 이후 교회의 심의에서 정경에 들지 못하고 사복음서만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수록된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마가복음입니다. 서기 70년경에 기록된 마가복음의 예수님이 복음의 원형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마가(개인이 아니라 아마도 마가공동체)가 소개하는 예수님은, ‘하늘 위의 저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해 오신 개혁자였습니다. (하지만 훗날 16장 9~20절이 첨가되었습니다).

 

마가복음보다 10~20년 정도 늦게 기록되었으며, 마가복음의 기록을 상당 부분 인용한 것으로 확인된 마태복음(서기 85~90년경)과 누가복음(서기 80~90년경)에는 개혁자로서의 예수님보다 신적인 예수님의 모습이 더 많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서기 90~100년경)에 나타난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로고스)으로서의 하나님’으로 그려집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님 사후 40년 동안 입으로 전해진 후에야 기록되었기에 ‘사건’과 ‘기록’ 사이에 긴 간격이 있다는 점과,
복음서에는 ‘사실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가 함께 담겨있다는 점
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 중에서 사실의 언어로 기록된 것과 고백의 언어로 기록된 것을 정확히 구별하여 사실의 언어는 사실의 언어로, 고백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날 교회는 사실의 언어와 고백의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사실의 언어로 해석했기에, 배타적인 교리가 안고 있는 모순과 함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에서 ‘신앙의 대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이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삼백년쯤 지났을 때, 예수에 대한 모든 논의가 차단되고 오직 한 가지 해석만 통용되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정권 유지와 로마제국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예수님이 ‘신의 아들’을 넘어 ‘신 자체’가 되었으며,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선포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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