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만이 나의 구세주" 임을 고백하며.../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Jul 22, 20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수님만이 나의 구세주" 임을 고백하며...

                                                                                                                          산들바람

저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국 교회의 여느 교우님들처럼 예수님을 제 인생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금도 믿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떳떳이 저의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으며, 여전히 제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고백은 교리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와 부활신앙과는 매우 다릅니다.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기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 이른바 ‘교리적 대속신앙’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교리적 대속신앙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부활신앙도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 배타적 교리로 인해 발생하는 무서운 갈등과 폭력이 우리 기독교와 지구마을의 미래를 덮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리적 대속신앙은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신앙형태 이외의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인정할 수 없는 배타적 속성을 안고 있으며, 결국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옳다면 그 ‘배타적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나서 비로소 복음서에 기록된 ‘전승’이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복음서 기자가 직접 들었거나 정확한 자료 조사를 통해 객관적 증거를 확보한 후에 기록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아들이며,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기에, 인류의 죄를 대속할 유일한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것은 로마제국의 안녕과 통일을 절실히 원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이념적 구심점을 세우기 위해 서기 325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열고 참석한 주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통일된 의견을 내놓도록 압력을 가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으로 선포하고 다른 해석을 차단하기 전까지 약 300년 동안은 오늘날처럼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신앙이 공존했으나, 니케아에서 태동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론이 이후 천여 년 동안 중세 암흑기를 지배하는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전통 기독론이 재해석되었고, 이제는 열린 신학을 통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배타 교리에서 벗어나 포용주의를 거쳐 다원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불교를 비롯하여 이웃종교와도 자유롭게 교제하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다원주의 신학이 이단으로 배척되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교리적으로 대속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고난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신데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 의로운 선택 말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야 했지만, 정복자 로마의 정치체계에도 순응해야 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건 잠시는 살아도 결국은 영원히 죽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선택이, 영혼의 눈이 멀었던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정신적 영적으로 장애를 겪으며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자유와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예수님의 위대한 정신이 뚜렷한 본이 되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의와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며 생명의 길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뚜렷이 알게 되었고,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로, 저는 주님의 대속을 믿으며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저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족하지만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옛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저를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제 마음과 삶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아름답고 찬란한 삶과 말씀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과 삶 가운데 다시 살아나 세상을 뒤바꾸는 힘이 되고 생명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도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천 년 전, 나는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하려느냐?”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도,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교리적 대속신앙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는 너무나 다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아무 전제 없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과 뜻을 크게 배반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적 대속신앙은, 그렇게 믿는 사람을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 ‘교리에 종속된 노예’로 만들어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할 뿐 아니라, 다양한 신념과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문화를 부정하고 갈등을 일으키기에, 이제는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종종 등장합니다.
신약성서에도 교회와 신자를 신랑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발견됩니다.
교리를 통해 이 비유를 읽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와 신자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권위자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유를 교리가 아니라 관계성으로 읽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저와 함께 동행하시며, 저와 함께 먹고 마시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십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비유의 틀에 의하면, 저는 제 인생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신랑이며 저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제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셔서 제 손을 잡아주셨으며 저의 눈물을 닦아주셨고, 저는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분과 결혼하였습니다.
지금 그분은 제 안에, 저는 그분 안에 있어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과 맺은 ‘관계’에 의해서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보다 도덕적으로 더 훌륭한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저의 구세주이며 저의 영원한 신랑이십니다.

제가 아직도 기독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이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남으려는 이유는, 이렇게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도록 안내해 준 기독교가 이웃종교에 비해 ‘객관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저의 아버지보다 훌륭한 분들이 세상에 많다 하더라도, ‘그리운 내 아버지’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Articles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