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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3.01.03 22:15

문학평론가 이원조(李源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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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이원조(李源朝) 선생

 

야야, 암만캐도 뭔 일이 터질라는 갑다. 난데없이 이기 무신 소리고? 김일성이하고 박정희가 한꺼번에 미치지 않았다믄 이거는 틀림없이 뭔 일이 터질 징조라. .......... .......... 남한 적십자 제의도 여삿일 아니지만 그 숭악한 북쪽 것들까지 이렇게 나오는 것은 더 심상찮다.”

그제서야 명훈은 어머니의 걱정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아 핀잔처럼 말했다.

어머니도 참. 자꾸 의심을 해서 그렇지, 하마(벌써) 전쟁이 끝난 지 이십 년이잖습니까? 이제 서로 그만 일쯤은 할 만한 시대가 되었다구요.“

아이다. 글찮다. 나는 뭔가 기분이 안 좋다. 6.25 날 때 어옜는 줄 아나? 북쪽에서 난데없이 남한이 간첩으로 잡아놓은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하고, 저가 뿌뜰고(붙잡고) 있는 조만식(曺晩植)이를 바꾸자꼬 안캤나? 그 때도 할 만한 일이라고 세상이 떠들썩했제.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아침에 조만식이를 죽이고 남으로 쳐 내려온 게 바로 6.25 아이가?”

(이문열 장편소설 <변경> 3부 떠도는 자들의 노래, 1279-80 )

 


작가 이문열이 쓴 자전적 소설인 <변경>에서 월북한 남편을 둔 어머니와 월북자의 아들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야하는 명훈이 나눈 대화의 일단락을 인용한 까닭은, 작가가 설정한 소설적 프레임 배경이 곧 바로 6.25가 끝나고 베이비부머로 내가 남한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온 시대와 반공교육의 소산(所産)으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나의 내면의식을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문열이 쓴 많은 작품 중에서도 <변경>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나의 경험은 또한 나와 동년배로 북한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의식도 나와 정반대의 경우일터이지만 유형적으로는 나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나와 그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동안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힘입어 자유주의적 사회분위기에서 살면서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났지만, 김일성 주체사상 독재체제로 굳어진 북한의 동년배들에게는 훨씬 더 경직화되어 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분단이후부터 현재까지 상이한 체제하에서 살아온 남북한 국민 대다수의 의식형태일 것이고, 이 간극(間隙)을 메워야만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었던 과거 상처를 봉합하고 앞날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선대 때 저질러진 일로 인해 후손들에게 무겁게 주어진, 이데올로기 시대가 종언(終焉)을 고한 현재 시점에서의 난제이다.

 


냉전시대의 시작과 함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맞부딪힌 결과, 손바닥 크기의 한반도에서 강대국들의 독점적 지배를 위한 대리전을 같은 동족끼리 처절하게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미소 강대국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한 변경에서 태어난 결과, 일생을 굴절된 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지식인의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어릴 적 학동시절, 재미삼아 땅 개미 두 마리를 잡아 얼리고 부빈 후 붙여놓으면 허리가 끊어지도록 서로 물고 떨어질 줄 모르던 두 마리 개미의 싸움이 내 조국의 현실이 될 줄이야. 나에게는 그것이 놀이였지만 두 마리 개미에게는 사생결단이었다.

 


명훈 어머니의 말에서처럼, 19727월에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은 당시 중학교 학생이던 나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기에 족했다. 어제까지 불구대천의 원수이던 북한 괴뢰도당이 하루아침에 한민족으로서 머리를 맞대고 회담을 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당시 남북 정권이 서로의 국민을 속이고 기상천외의 치졸한 권력놀음을 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정권이 연출한 남북공동성명은 남한에서는 곧 시월유신(十月維新)이라는 유신독재 체제의 불가피한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부자세습(父子世襲)이라는 대를 이은 독재체제의 구축을 꾀하고자 한 기만술책이었음을 알기에는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민족의 절대명제인 통일을 두고 남북 두 정권이 각자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었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스승이 한 분 계신다. 국문학자이셨던 이동영(李東英) 교수님은 내가 한문(漢文)을 배운 은사님이셨다. 1989년 내가 유학하던 대만의 대학에 일 년간 교환교수로 오셔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고, 1990년대 초 귀국한 후 부터 뉴질랜드로 떠나오기 전까지 내가 모시고 여기저기 방문하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뉴질랜드로 온 지 몇 년 후 은사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회갑연이 있던 그 해 어느 날, 하객들이 모두 떠나고 나와 단둘이 있을 때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내 어릴 적 겪은 육체적 고생과 정신적 고통으로 보아 내가 60넘어 사는 것은 참 천운일 것이네.”

 


은사님께서는 1943, 11살 나이에 선친이신 이원기(李源祺) 열사를 여의고 고아가 되셨다. 선친께서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 의해 감금되셨다가 감옥에서 옥사하셨다. 중부(仲父)이신 이원록(李源祿) 역시 일제에 의해 감금되셨다가 19441월에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하셨으니, 이 분이 바로 청포도 시인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이육사(李陸史) 이시다. 일 년 사이에 백중(伯仲) 두 형제가 세상을 뜨신 것이다. 이육사는 학생시절에 형님 이원기 아우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조선은행 폭탄투척 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왜놈의 감옥살이를 하였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근교의 조선의열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후 임무를 띠고 귀국하였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다시 북경으로 호송되어 그곳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이글에서 필자가 회고하고자 하는 문학평론가 이원조 선생은 큰형 이원기 열사와 둘째형 이육사의 아우로서, 퇴계 이황(李滉)14세손이 되시는 진성(진보) 이씨 6형제 중 넷째이시다. 이원조는 1909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고,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법정대학(法政大學) 문학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졸업논문으로 <앙드레지드 연구>를 썼고,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와 학예부장을 역임하였다.

 


이원조 선생은 중형(仲兄)이신 이육사가 19441월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옥사하자 1946년에 그의 유고집 <육사시집>을 출간하였다. 해방 후 그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유석 조병옥 박사가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하였으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처벌하지 않고는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지조를 굽히지 않으셨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거나 굽힐 줄 모르는 지조로 민족정조를 지키다가 남북분단이 기정사실로 굳어가던 1947년 말에 월북하였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탓으로 북한에서 선전선동부 부부장 직책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 직후 약 3개월간 서울이 인공치하에 들었을 때는 서울에서 해방일보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인민군이 패퇴하자 따라서 월북하였다가 종전직후 19538월 남로당 숙청 때 임화(林和) 설정식(薛貞植) 등과 함께 미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가 1955년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월북하기 이전의 이원조의 문학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일보와 당시 잡지에 여러 차례 게재되어 있던 것을, 은사이신 이동영 교수께서 만년에 <오늘의 문학과 문학의 오늘: 이원조문학평론집>(형설출판사, 1990)이란 서명으로 출간하셨다. 은사님께서 만년에 <일하(一荷) 이원기 선생 순국 50주년 추모논총>을 발간하셨고, 미아리 공동묘지로부터 이육사의 유회(遺灰)를 경북 안동의 고향 뒷산으로 옮기고 나서 이육사 시집발간과 시비건립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이원조문학평론집>을 내신 뜻을 이제는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책의 자서(自序)에서 은사님께서는 우리 집은 나라가 망하면서 함께 망해버린 집안이다.”라고 토로하신 적이 있다. 망국과 함께 망해버린 집안이 어디 한 둘이랴마는, 내가 가까이서 접해 본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뛰어난 재화(才華)를 타고난 6형제분들의 일생이 일제강점에 이은 민족분단으로 풍지박산이 나버린 가장 생생한 경우이다. 은사님께서는 남에게 그토록 말 못할 울분과 함께 남겨진 고통을 어깨에 짊어지고 일생을 살다 가신 것이다.

 


우리들의 주목을 끌지도 못했고, 더구나 월북한 분이기에 잊혀진 문학평론가 이원조의 문학과 활동에 관한 기록은 한국현대사를 기록하는 여러 글에 산재하여 보인다. 작가 이병주의 실록대하소설 <지리산>에도 기록으로 나온바 있고, 우리민족의 분단비극을 문학적으로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이라는 평판을 받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그의 이름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원조를 모르는 분들은 그냥 읽어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분의 조카이신 이동영 은사님과 생전에 마주앉아 말씀을 듣는듯한 심정으로 <태백산맥>을 읽었다.

 


또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였던 이태(李泰)가 쓴 수기인 <남부군>에는 김일성이 이원조에게 뒤집어씌운 죄상으로 박헌영에게 드리는 헌시를 쓴 것과 박헌영 선집을 발간하려 했던 죄목 등이 열거되었다고 쓰고 있다. 처음부터 남로당은 안중에도 없었던 김일성이 종전 후 남쪽출신들이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패전의 희생양으로 한꺼번에 숙청한 것은 자신이 북한권력을 독점하려는 단계적 수순이었던 것이다.

 


민족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던져 민족자주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은사님의 선친과 중부 숙부님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조국에서 은사님은 월북한 삼촌 이원조 때문에 교수직에 임용될 때 연좌제에 걸려 신원조회에서 불가판정을 받으셨다. 그러나 가문의 사정을 잘 아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한 분이 신원보증을 해주어서 다행히 통과된 사실을, 정년퇴임하시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 나에게 들려주실 때 은사님의 눈시울에는 엷은 물기가 번졌다. 일제에 의한 국권강탈과 해방직후 우리 민족이 겪은 총체적 비극이 압축되어, 겨우 열 살 넘어선 고아로 가장이 된 한 개인에게 내리누르는 고통의 짐을 일생동안 두 어깨로 견디어 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하실 동안 얼마나한 원통함과 말 못할 비분을 속으로 감추고 살아오셨을지 나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은사님께서는 만년에 가족이 그렇게 된 내력과 울분을 속으로 삭이고 또 삭이면서 살아오신 일생을 아주 드물게 나에게 토로하셨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그때 철이 덜 들어 잘 깨닫지 못했고, 따라서 좀 더 지극한 정성으로 은사님의 마음속 응어리를 위로해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지금 문학평론가 이원조 선생에 대하여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짧은 글이나마 쓰는 이유는, 생전에 은사님께서 나를 아끼시고 베풀어 주신 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침 한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근혜와 일 년 전에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승계한 김정은은 민족분단과 남북 간 극한 대립을 조성한데 대한 응분의 역사적 책임을 져야할 과거 최고정치지도자들의 적장자손(嫡長子孫) 들이다. 선대의 과오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박근혜와 김정은 두 지도자는 한민족 전체를 보는 대국적 관점에서 큰 정치를 행하여 집권기간 동안에 반드시 우리 겨레의 소원인 국가통일과 민족 재통합의 기반을 구축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조국광복과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애족 선열 지사들의 영혼이 구천(九天)에서나마 위로받게 되기를 희망한다.

 


박 인 수

2013. 1. 3   

  • ?
    칼있으마 2013.05.13 23:16
    박인수선생님께 문학평론가 이원조선생은 저의 네째숙부님이시며 고인이되신 이동영부산대학교 교수는 저의 사촌형님이 되십니다. 저는 중국의 한국섬유회사 대표이사로 근무하다가 2008년에 은퇴하여 영남대에서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글을 보시면 저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휴대폰은 010-2520-7373 이며 이메일은 dhlee0264@hanmail.net입니다.  건강하시고 가내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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