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의 실체를 파헤친다
단기 4345년 오클랜드 한인회 주최 개천절 기념행사 강연(2012. 10.3)
1. 문제의 발단
1980년대 중반 무렵 중국 고고(考古) 학계의 발굴 작업이 만리장성의 동북 외곽인 내몽고(內蒙古) 자치주 츠펑(赤峰=적봉) 교외 홍산(紅山) 지역에서 진행되었고, 발굴 결과 중국 고고학계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중국이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자부하는 황화문명보다 1천년이 앞서는, 황하문명과 전혀 다른 문명이 이 지역에서 넓게 형성되어 있었음이 발굴로 확인된 것이다.
이에 중국학계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뒤집고, 과거 중화문명이 아닌 ‘오랑캐’ 영역으로 문명이 없었다고 주장해 왔던, 만리장성 바깥의 역사를 새로 고쳐 써야 하는 곤란에 직면한 것이다. 만일 새롭게 발굴된 문명에 대하여 그것이 황하문명과는 별다른 ‘제5의 문명’임을 중국학계에서 인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나, 중화사상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자존심이 유별나게 높은 그들은 그것을 중국의 황하문명과 모종의 ‘접붙이기’ 작업을 시도하고 중국문명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과욕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새로 발굴된 문명은 황하문명과 전혀 다른 ‘랴오허(遼河=요하) 문명’ 이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에서 동북쪽 바깥 1천 Km나 떨어진 지역에 ‘랴오허 문명’을 이룩한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바로 동이(東夷)의 선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이족은 중국의 산동 반도와 요동 반도 한반도 등지에 널게 분포되어 살던 선민들이다. 고조선과 부여를 건국한 예(濊) 맥(貊)의 선민일 가능성이 높은 한민족의 원류이다. 학계에서는 이들을 고 아시아 족으로 분류한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본 그들의 무덤은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돌무지무덤(積石塚=적석총)으로 랴오둥(遼東) 지역에 산재한 고구려의 고분과 일치하고, 장신구로 쓴 옥 귀걸이도 한반도에서 발굴된 것과 일치하고, 그들이 사용한 토기도 빗살무늬(櫛紋=즐문)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과 일치한다.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의 방사선 동위원소 측정으로 연대가 기원전 약 7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점에서도 시대적으로 비슷한 점이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다.
중국은 발굴 유물들이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중국의 역사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로 중국고대사 영역의 재확정 작업을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것이다. 또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起點)을 지금까지 자타가 인정하던 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을 버리고 마치 고무줄 늘리듯이 연장하여 랴오둥(遼東=요동) 반도에 위치한 고구려 통치 지역이었던 호산산성이라고 주장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2.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우리가 이미 언론지상을 통하여 자주 들어 알고 있는 중국정부 주도로 과거 만주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일컫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중국공산당이 통치의 정통성(legitimacy of communist party ruling)을 제고하기 위하여 중국 내 각 소수민족의 대통합을 목표로, 정부의 막대한 지원으로 거시적인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 학술의 이름 가장한 역사왜곡 작업이다. 겉으로는 학문적 연구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은 중국공산당의 계산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부주도로 진행되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 만주지역은 고대부터 한민족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 부여, 고구려가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던 지역이다. 그러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하여 노리는 바가 고구려사를 중국내 변방 소수민족 역사로 바꾸어 중국 지방사로 탈바꿈시키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만약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편입되고 나면, 고구려 이전인 고조선과 부여의 역사는 자동적으로 중국의 역사로 탈바꿈 되어 한민족의 민족사적 근원이 사라지고 만다. 민족의 혼을 뺏는 일은 그 민족의 고대사를 말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과거 일제식민지 일본사학자들이 우리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대사를 왜곡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동북공정은 2002년 2월, 중국 최고의 국가연구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中國社會科學院)과 중국 동북3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소재 중점대학의 관련학계 학자 약 200명이 합동으로 소위 ‘동북변방 역사와 현재 상황에 관한 종합 연구계획’ 이라는 제하에 조직한 연구 과제로 시작한 작업이다. 연구를 지원하기 위하여 중국정부는 5년 동안 인민폐(RMB) 1,500만 위안(元)의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였다. 연구자들로서는 정부로부터 단일 지역 연구과제로서는 과다할 만큼 많은 연구비를 수령하여 연구를 진행하였고 초보적인 연구결과가 이미 발표되었다. 중국정부는 2015년까지 연구결과를 토대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역사교과서를 개편할 계획이다.
3. ‘동북공정’의 주요내용
아래에서 동북공정 참가 연구자들이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동북공정은 연구의 범위를 크게 3가지로 분류하였다. 과제별로 기초연구와 응용연구, 번역, 당안(檔案, 문서보관) 자료 등 3개의 큰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다음 각각의 영역별로 진행되는 동북공정의 연구방향을 주요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 중국 동북의 강역(疆域, 변방지역) 연구
둘째, 동북 지방사 연구
셋째, 동북 민족사 연구
넷째,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 연구
다섯째, 중조(中朝, 중국과 한국) 관계사 연구
여섯째, 동북 변강(邊疆, 국경지역)과 러시아 원동(遠東, 연해주) 지역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
일곱째, 동북 변강(邊疆) 사회 안정을 위한 전략 연구 등의, 일곱 가지 내용을 주된 연구 목표로 설정하였다.
동북공정은 위에서 설정한 일곱 가지 연구 목표 중 여섯째인 러시아 원동(연해주) 지역과의 관련 항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경제적 제 방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점을 우리로서는 크게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정부는 이들 일곱 개 방향에 걸쳐 학자 전문가들로 하여금 관련 사료를 발굴하여 번역하고 분류 보관하도록 하여 역사교육의 자료로 채택하고, 나아가서 이들 연구결과를 응용하여 장차 정부가 채택할 각종 정책 자료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이런 목표 하에서 학자들을 동원하여 진행하는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이다.
4. ‘동북공정’의 주요 쟁점
다음으로 동북공정에 참여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 역사와 관련하여 주장하는 현재까지 나타난 주요한 쟁점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 민족은 중국 고대 지방 민족의 한 정권에 속한다.
둘째, 고구려와 고려 정권 간에는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셋째, 고구려와 현재의 북한 정권 간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넷째, 고구려와 현재 한국 정권 간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다섯째, 고구려사의 주체적 부분은 이미 중화민족의 ‘대가정(大家庭)’에 융화되었고 그 일부분이 현재 조선민족의 한 부류에 편입되었을 뿐이다. 모순되는 주요 부분의 입장에서 볼 때 고구려와 현재 조선민족간의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동북공정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상의 다섯 가지 쟁점적인 주장을 통해 볼 때, 앞선 네 가지 주장은 마지막 다섯 번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와 가설일 뿐이다. 그것은 고구려 역사를 송두리째 중국역사에 짜깁기하려는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학술연구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말 그대로 ‘공정’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논리라는 것이 때로는 애매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도 논리적(부분적으로) 모순 없이 성립할 수 가 있기 때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리로 그들의 가설과 추론이 논리적 오류 또는 비논리적(logically illogical)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들의 논리대로 주장한다면, 어떤 나라의 학자들이 정부의 지원으로 “징키스칸(몽골)의 역사, 여진족(금나라)의 역사, 만주족(청나라)의 역사는 현재 중국공산당의 정권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라고 주장하여 중국역사의 한 토막을 고의적으로 중국역사에서 떼어 내버리고자 하는 논리도 성립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과연 역사가 그렇게 된다면 즉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 의도하는 바대로 가변적일 수 있다면 역사학의 학문적인 존재가치는 없어진다는 말이다. 동북공정 학자들의 논리는 그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동북공정 연구에 참여하는 학자들의 비학문적 양심과 중국공산당 정권이 의도하는 바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들의 간계(奸計)를 한국(남북한) 정부와 국민들이 수수방관으로 방치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다섯 가지 쟁점들이 중국학자들이 진행한 ‘동북공정’의 초보적인 연구결과로 우리의 지대한 주목을 끌고 있다.
역사학 연구의 방법은 분석된 사료를 바탕으로 실증적으로 해석하여 결론을 도출하고 학계의 공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다섯 가지 쟁점을 두고 볼 때 동북공정 학자들의 논리는 먼저 결론을 정해 놓고 역으로 사료를 거기에 짜 맞추는 ‘역사 짜깁기’ 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이미 퇴물이 된 고전적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시각을 현대의 역사기술(historiography)에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역사학 방법론적으로 매우 유치함을 보여준다.
5.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
동북공정은 중국공산당 정권이 최근에 들어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삼아 그동안 잃었던 중화의 부흥과 부국강병을 이룩한 후 야심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과거역사를 인위적으로 왜곡하여 구성하는 공정(엔지니어링)인 것이다. 중국은 ‘서북공정’을 통하여 신강위구르 역사도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고자 시도하고, ‘서남공정’을 통하여 티베트의 역사를 유린하고 있다. 즉 돌궐족(突闕族, 투르크) 후예의 역사와 티베트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동북공정은 우리 민족사의 뿌리인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왜곡하려는 시도이다. 우리에게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일 수가 없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2003년 12월 9일, 한국 고대사 학회, 한국 고고학회, 한국 근현대사 학회 등 17개 국내학회에서 연합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문에서는 중국은 고구려사의 중국역사 편입과 왜곡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중국정부는 이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정부에서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 25명이 중국의 역사왜곡 중지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가 있고, 정부의 강력한 항의제출과 북한과의 공동대응을 촉구하였다. 이에 중국정부는 2006년 9월 5일 중국외교부 발언인 친깡(秦剛=진강)은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은 학술적 차원의 연구이며 정치적 의도는 없다”라고 회답하여 근본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불성실한 답변을 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이론을 대변하는 광명일보(光明日報)는 ‘고구려 역사연구의 몇 가지 시론’이라는 제목의 글로 중국사회과학원 변방연구소 3인 공동 연구자의 명의로 글을 게재하면서 “고구려 정권의 성격은 중원 왕조의 제약을 받으면서 지방정권으로 관할한 중국 고대 변방민족 정권이다”는 논지의 글을 실었다. 만일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두고 중국 소수민족 역사를 중화민족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한다면, 한국사는 중국민족 역사에 흡수된 부분과 아직도 흡수되지 않은 부분이 있고, 북한지역이 과거 삼국시대 고구려 영토였음을 감안하면 장차 북한도 중국의 역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민족 최대의 과제인 통일을 아직도 이루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듣기에 아주 묘한 논리일 수밖에 없다.
이에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왜곡 진행과정을 세밀히 추적하고 기록하여 관련 국제기구와 국제학계에 보고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주변 국가인 베트남, 외몽고,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 등의 학자들과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자주 개최하여 중국의 왜곡행위를 국제적으로 알려나가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은 2011년 10월 1일자로 중앙아시아의 신생독립국인 타지크스탄 으로부터 파미르고원의 양국 접경지대에서 제주도 면적 정도의 영토를 정부협정을 통해 중국 영토로 귀속시켰다.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장차 통일을 이루고자 할 때 중국이 남북한 통일에 대한 국제적 동의의 대가로 요구할지도 모르는 일부 북한지역의 중국흡수가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해방직후 강대국 흥정에 민족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6. ‘동북공정’의 자가당착
중국의 동북공정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모순이며 자가당착임을 나타내는 근거는 많다. 그 중에서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중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사학자요 금석학자로 갑골문(甲骨文)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자,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이 매우 존경했던 학자인 꿔머루오(郭沫若=곽말약, 1892-1978)는 일찍이 그의 논문에서 고대 만주지역의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는 중국민족의 역사가 아님을 그의 저술에서 논구한 바가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충실했던 중국 사학계 주류 학자 판원란(范文灡=범문란, 1893-1969)도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는 중국민족사의 범주가 아니라 세계사의 한 부분임을 인정한 사실이 있다. 그가 말한 세계사는 한국사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공산당 정권이 2000년대에 들어서 과거태도에서 일변하여 남의 역사를 가로채려는 저의가 무엇인가?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표현되는 역사연구가 ‘역사 제국주의’ 망상과 역사 날조 행각임을 각성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1960년대 북한과 공동으로 만주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벌인 바 있고, 당시 발굴한 고구려 문물을 모두 북한에 넘겨준 사실이 있다. 중국 스스로 고구려역사는 한민족의 역사임을 인정한 사실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7. 현실적 난제
중국의 동북지역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사의 시발점이긴 하지만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비록 문헌적 사료나 고고학적 발굴로 우리의 역사임을 주장한다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중국의 영토 관할권에 속하는 지역이므로 자꾸만 세월이 흐르면 우리에게 불리해짐을 인식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분열 상태에 놓여 있으므로 비록 고대사의 쟁점부분에서 남북한 학자들이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입지가 약한 점을 피할 길이 없다.
과거 일본의 식민사관 학자들이 역사를 날조하여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주장, 즉 삼국시대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가야) 일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히 설득력이 소멸해 버린 점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 지역이 현실적으로 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백제 유민이 한반도에서 ‘나라’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세운 곳이 현재 일본의 ‘나라(奈良)’ 지역이지만 그것이 한국역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이치와 같아진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그동안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지난날 너무 안이하게 고조선을 위시한 한국 고대국가의 연구를 미온적으로 행해 왔다는 점이다. 해방 후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의 식민지사관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따라서 주류 역사학자들이 주체적으로 민족사관 정립에 소극적으로 임했던 점에도 원인이 있다. 주류사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그들 스승의 일제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고조선을 위시한 고대국가 관련 연구는 대부분 재야 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학계에서 목소리가 크지 못했던 점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제 중국의 ‘요하(랴오허)’ 문명에 대한 고고학 발굴에서 모습이 드러나듯이 실재한 고조선 역사를 일본학자들이 주장했던 신화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내버려두고 역사학적 단계와 대상으로 차원을 끌어 올리지 못한 점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오히려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조선통사(상하 양권)>에 나타난 바, 비록 유물주의 사관에 입각한 결점이 많지만 적어도 고조선을 비롯한 고대사 연구부분에서 한국학자들보다 더욱 방대하고 세밀하다. 관련분야 연구에 정부에서도 재정적 지원을 크게 늘려야 할 것이다. 사실 중국 동북공정 참여 학자들이 고구려 연구에 매달리는 것도 중국정부의 대대적 지원 때문이다.
역사상의 실지(失地) 고토를 되찾을 수 있을까? 장차 남북이 통일을 이룩한 후에 일제가 만주 철도부설권과 석탄개발 이권과 교환조건으로 간도협약(1909. 9)을 체결하여 중국(청나라)에 넘겨버린 간도지역(연변 조선족자치주와 연해주 일부)을 되찾을 수가 있을까?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던 선례의 하나로 2차 대전 전에 독일에 강제로 합병되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동북부 국경지역에 위치한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을 예로 들 수 있다. 알사스-로렌은 종전 후 주민투표(Plebiscite)를 통해 다수의 주민이 원하는 국가(프랑스)로 영토가 귀속되었다.
지린성(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행정수도인 연지(延吉=연길)시의 인구를 두고 볼 때, 필자 일행이 학술연구 자료수집 차 현지를 방문했던 1994년 말에 이미 비조선족(한족포함)이 조선족을 인구비율에서 과반수로 앞지르고 있었다. 중국은 남북통일 후의 먼 장래까지 내다보고 이미 대비한 것이다. 조선족들이 민족대학으로 자부하는 연변대학의 교수 언어도 조선어에서 중국어로 전환(조선어문학과와 조선역사학과는 제외)한 상태였다. 대학졸업 후 중국 각지에서 취업할 때 중국어 구사능력에서 불리한 까닭으로 조선족 교수와 대학생들이 요구한 결과라고 말하였다.
8. ‘춘추필법(春秋筆法)’ 정신으로 돌아가라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중국의 역사인 <25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왕조 역사를 총괄한 사서가 곧 <25사(二十五史)> 이다. 그 첫 번째가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시작하여, 반고가 쓴 한서(漢書), 진수가 쓴 삼국지(三國志), 그리고 5대 16국의 역사를 기록한 남사(南史) 북사(北史), 당(唐) 송(宋) 요(遼) 금(金) 원(元) 명(明) 청(淸) 대까지 사서 모음이다. 학자에 따라 청대(淸代)를 빼고서 <24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은 역사기록에서 명분과 대의에 입각해서 사실(史實)을 매우 엄밀하게 기록한 것으로 정평이 높다. 왜 그런가하면, 역대의 사학자들은 시대의 산물인 역사기록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정신을 남긴다는 자부심으로 매우 뛰어난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근원을 추적해보면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영향이 지대하다. 역사기록자(historiographer)들은 적어도 역사기록에 있어서는 목숨을 걸 정도로 투철한 정신이 그때부터 자리 잡았고, 그러한 정신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부른다. ‘공자가 춘추를 짓자 난신적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孔子作春秋, 而亂臣賊子懼)’는 말에서 유래한 역사기록 정신이다.
사마천은 황제(한무제)의 노여움으로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을 겪으면서도 집념을 버리지 않고 <사기>를 완성하였고, 진수(陳壽)는 <삼국지>를 집필할 때 ‘위(魏) 정통론’을 내세워서 많은 이들이 존숭한 유비와 제갈량의 촉(蜀)을 비 정통으로 보았고,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된 집필에 비분한 구양수(歐陽修)는 생애를 바쳐 <신당서(新唐書)>를 지어 <구당서>의 편견을 바로 잡았다. 이들 역사가는 모두 왕조의 아부나 세상의 인기를 떠나 서슬 푸른 ‘춘추필법’의 정신에 투철하였다. 모름지기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학자라면 그러해야 할 것이다.
중국역사 기록정신의 우수한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지금 현재 중국의 관변 ‘어용학자’들에 의해 진행되는 동북공정은 역사기록자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춘추필법’ 정신을 져버린 것이다. 혹은 권력에 이용당하하거나, 혹은 물질(돈)에 학자적 양심을 팔았다는 비방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동북공정은 이제 경제적 군사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공산당 통치하의 중국이 주변 약자에 대하여 행사하는 오만함의 숨김없는 표현이다. 그것을 통해 ‘대중화(大中華)’ 또는 ‘중화의 부흥(復興)’을 입증하려고 하는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진 자아팽창적인 정권과 거기에 동조하는 학자들의 편견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동북공정’은 길이 역사에 오명(汚名)을 남기는 작업임을 엄숙하게 지적하면서 글을 맺는다.
박 인 수
2012.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