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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중앙(中共中央) 권력투쟁 감상법(1)

by 박인수 posted Apr 0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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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중앙(中共中央) 권력투쟁 감상(1)




1949년 10월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지 금년으로 63년이 되었다. 1921년 7월에 13명의 공산당원이 상하이에서 비밀회동을 한 것이 중국공산당(약칭 中共)의 공식적인 시발점(제1차 대표대회) 이었고, 금년(2012) 11월에 제 18차 대표대회를 앞두고 있다.



13억의 인구를 움직이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력은 중앙정치국에 있고, 중앙정치국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은 9명으로 구성된 ‘중국공산당중앙상무위원회(약칭 중공중앙)’의 수중에 놓여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였을 때 9명 중, 당시 아프리카를 순방 중이던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에서 한꺼번에 조문하는 모습이 방송화면에 비쳤다. 이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북한이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장차 남북통일이 되거나 또 안 되거나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들 9명의 중공중앙 최고 권력자들은 최근 물밑에서 매우 심각한 권력투쟁을 하고 있는데, 이들의 권력투쟁이 우리에게는 그저 남의 나라 흥미 거리나 강 건너 불구경으로만 볼 수 없는 상황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리에게 중국은 분명 남의 나라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 일이라고 삼국지의 제갈량과 주유의 싸움을 보며 즐기듯이 할 수 없음이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이다. 원래 남의 나라 정치판 싸움은 그 나라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무협지 소설보다 더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운영은 공산당의 지도이념을 따라야 하고, 막강한 군대(인민해방군)는 공산당의 지도노선에 복종하게 되어있는 것이 현재 중국의 헌법이 정해 놓은 통치체계이다. 막강한 군대를 소유한 정당(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 국가가 중국이다.



그러나 그것도 남의 나라 사정인 만큼 내가 문제 삼을 수도 없다. 중국의 경우 민주국가처럼 최고통치자를 주기적인 선거에 의해 선출하지 않는 제도로 말미암아 권력투쟁이 주기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고, 중국의 현재 경제력을 놓고 볼 때 그 영향은 타국에 직간접적으로 미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점을 염려할 따름이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에게는 자칫하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외국에서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을 만나고 자주 만나 익숙한 이들과는 많은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때로는 아주 심각한 것까지 상대를 봐가면서 골고루 하는데, 젊은이들을 만나면 인터넷으로 중국 정부의 위로부터의 정치개혁을 위한 여론형성을 하도록 권유한다.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그런다고 강조한다. 최하급 지방조직에서만이 아닌, 북경시장을 북경시민이 선출하고 각 성의 성장은 성(省)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정치개혁을 공산당 지도부에서 점차 실시하도록 말이다.



과거의 전 세계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중국도 국민평균 일인당 GNP가 2천5백 불을 넘으면 반드시 내부로부터 민주화운동의 바람이 불게 될 것이고, 공산당이 과거 천안문 사태 때처럼 무력진압으로 밀어붙이면 중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10여 년 전에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 논문지에 ‘중국의 경제개혁 성과와 정치개혁의 상관성’에 관한 영문 글을 한 편 개제한 적이 있다. 정치개혁을 동반하지 않는 경제성장 일변도 정책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정치개혁 욕구에 부딪히면 매우 위태롭다는 것이 요지였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외국에 살면서 보고 들은 바가 있어 사람 말귀를 알아듣지만, 중국에서 평생 잔뼈가 굵어 아무것도 모르다가 자식들 따라 외국에 나온 중국공산당 당원 출신 중국 노인들은, 뉴질랜드에 살면서 뉴질랜드 정부의 노인복지수당 받아서 중국공산당 당원 연회비를 꼬박꼬박 납부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라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중국정부가 민주화로 정치개혁이 된다면 북한정권은 아무리 변하지 않으려 해도 않을 도리가 없다고 나는 본다. 그래서 중국의 정치개혁은 북한정권의 내부변화를 갈망하는 한국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비록 남의 나라 일이지만 중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의 지대한 관심을 이끈다. 그럼 중공중앙의 권력투쟁이 지금 왜 발생하는지 한번 살펴보고, 우리 모두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보기에 지금의 심각한 권력투쟁은 정해진 내부 규정(공산당에서는 법에 정한 룰이 없다)에 따라 권력에서 물러나면서 차(次) 차기까지 자신의 인맥을 핵심권력인 중공중앙 주석으로 심으려고 의도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과욕에서 발단한 것이다. 내가 ‘심각하다’고 우려하는 이유는 이번의 권력투쟁의 양상이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중공내부의 권력투쟁은 거슬러 올라가서 1950년대 중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시대 초기부터 줄곧 있어왔다. 마오쩌뚱은 그의 정적인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린빠오(林彪=임표) 등을 차례로 모두 제압하였다. 그 후 그는 일인독재를 하면서부터 1976년 9월 그가 사망할 때까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폐해를 뼈저리게 실감한 중공지도부는 11차 대회(1979)에서 ‘오뚝이 영감’(不倒翁=부도옹)의 별명을 가진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후, 최고 권력자 1인 지배 대신에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어 오늘날과 같은 중공중앙내의 9인 상무위원 제도를 만들게 되었다. 덩샤오핑 자신은 최고 실권을 장악하면서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다.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세대는 초기공산당의 도시폭동 시절부터 군대를 이끌고 강서소비에트 시대와 대장정을 거쳐 황량한 서북지방인 연안(延安)에서 토굴생활을 하면서 국민당과의 혈투를 거쳐 나온 혁명세대이다. 그들은 산전수전 공중전 안 해본 고생이 없는 이들이어서 일단 이들 중 어느 한사람이 권력을 잡기만하면 군대는 자연히 복종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이 죽고(1997) 그의 지명으로 3세대 지도자가 된 장쩌민과 그 권력을 이어받은 지금의 4세대 지도자 후진타오(胡錦燾)는 군대배경이 전혀 없다.



군대배경이 전혀 없는데도 두 사람의 권력기반이 흔들리지 않은 까닭은 바로 덩샤오핑의 유언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덩샤오핑이 이끈 개혁개방으로 말미암아 오늘 중국국가의 부강을 이룩한 것은 자타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이 90이 넘은 오뚝이 영감의 인생말년에 발생한 최악의 사태가 바로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태였다. 덩샤오핑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든 대학생들이 당내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학생들을 탱크로 무자비하게 깔아뭉개 버리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향후 1백 년 동안 공산당 일당독재로 국가를 이끌고, 군대는 공산당의 지도에 절대복종할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천안문 광장에 모여든 대학생들은 처음부터 민주화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들이 요구한 것은 가장 심각한 부패현상인 공산당 혁명원로들의 자제들의 횡포 때문이었다. 혁명원로 자제들을 중국에서는 태자당(太子黨)이라고 부른다. 이들 태자당 인물들이 개혁개방의 시류를 이용하여 모든 국가적 이권과 청탁으로 연결되어 국가를 태자당의 사유물로 여겨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권력의 비호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농단하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태자당은 당내 3대 파벌 중 하나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한다.



천안문사태 발생 직전에 덩샤오핑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실용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던 개혁개방 지향형 인물인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 주석과 자오츠양(趙紫陽=조자양)을 총리로 인선 결정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때마침 발생한 천안문 사태처리 방안을 둘러싸고 중공중앙이 골머리를 싸던 중에 후야오방 주석 내정자가 천안문 광장의 학생들을 방문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호랑이 수염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노한 덩샤오핑은 즉시 후야오방과 자오츠양을 가택연금 시키고 모든 당내권력을 박탈해버렸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 자오츠양 후계체제를 내치고, 당시 상하이 시당위 서기로 학생들을 강경하게 진압하자고 주장한 장쩌민을 일개 시 당서기에서 일약 중공중앙 주석에 지명하였고, 역시 강경주장을 외치던 리펑(李鵬)을 총리에 앉혔다. 그래서 당시 중국의 대학생들은 “하늘도 두렵지 않고 땅도 두렵지 않지만 리펑이 총리자리에 앉는 것은 두렵다(天不怕地不怕 就怕李鵬當總理)!”라고 외쳐댔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사후에 온건개혁파들이 득세하면 공산당이 이룩한 과업이 물거품이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 후로 덩샤오핑은 군대배경이 전혀 없는 불안한 장쩌민의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다음 주석 자리는 후진타오에게 물려주라고 유언하였고, 장쩌민은 덩샤오핑 생전의 분부를 꼭 지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죽고 없어도 후진타오가 지금의 주석에 오를 수 있었다. 부친이 도시에서 차(茶)를 팔던 소상인집안 출신의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의 총애를 얻은 까닭은, 그가 티베트 자치성 당위 서기를 맡던 1988년에 발생한 티베트 주민의 분리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인상이 덩샤오핑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집권과 마오쩌둥을 권력투쟁을 제1막, 덩샤오핑의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의 투쟁과 집권을 제2막 제1장으로 본다면, 덩샤오핑의 후견으로 주석에 오른 장쩌민에서 후진타오에 이르는 현재까지의 권력투쟁은 제2막의 제3장과 제4장에 해당할 것이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죽고난후 주석직에 있던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그룹으로 소위 말하는 상하이방(上海幇, 방은 원래 깡패조직을 말함)을 키워서 국가기구 요직에 기용하였다. 그때부터 상하이방과 태자당은 중공중앙에서 공고한 기초를 다졌고 차기 주석을 내정하였다. 중공권력 구조에서 또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파벌로 기술관료 출신으로 구성된 공청단(共靑團, 공산주의청년단) 출신들이 있는데 후진타오 현주석이 바로 공청단 출신이다. 현재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은 중공중앙의 3대 권력파벌을 이루고 있다.



중국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눈썰미 있는 독자들이라면 장쩌민 주석시절 그는 국내매체에서나 해외 순방에서 외국정상과 악수하면서 항상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와는 지극히 대조적으로 현재의 후진타오 주석은 어느 곳에서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웃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럴까? 절대로 아니다. 항상 입술을 꼭 다문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10년 가까운 집권 시기 동안 내부 돌아가는 상황이 웃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바로 장쩌민이 후계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의 상하이방과 손잡은 태자당을 중앙상임위원회에 9명중 7명을 앉혀 놓고 중요한 결정은 모두 장쩌민과 태자당의 의도대로 처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까닭에 표정에 웃음이 있을 리가 없다.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가장 높은 물망에 거론되면서, 금년 말에 5세대 지도자로 지명될 시진핑(習近平=습근평)은 전형적인 태자당 출신이다. 그는 오히려 표정에서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지금의 권력투쟁은 여기서 고비에 이르는데 자, 이제 중공중앙이 각본하고 연출하는 제2막의 연극무대가 제4장에서 제5장으로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제2막을 끝내고 제3막으로 진입할 것인지가 바로 금년 말에 예정된 18대이고 지금의 투쟁이 심각할 수밖에 없게 된 내막이다.



“하오시짜이호우터우(好戱在後頭)!” 진짜 볼거리는 후반부에 남아있다. 중국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계속)




박 인 수



2012.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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