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수

적인가 친구인가?(敵乎 友乎?)

by 박인수 posted Feb 29, 201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적인가 친구인가?(敵乎 友乎?)



지금부터 약 80년 전인 1930년대 초기의 중국은 군벌들에 의해 나라가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여러 갈래로 조각난 중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당시 중국의 영도자는 장제스(蔣介石)라는 인물이었다. 우리에게는 장개석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일본에서는 쇼가이세키라는 이름으로 1945년 8월에 일본이 연합국에 패망할 때까지 하루도 일본신문에 이름이 빠진 날이 없었던 인물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구축하는데 최대의 적(敵)이었다.


중국인들의 장개석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중국국민당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孫文)의 적자로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중국을 통일한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중국 민중의 열망과는 반대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고 서구제국 자본주의 매판자본 편을 든 제국주의의 주구였다.


중국에서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후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것을 찾아서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를 미소 강대국과 서구 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멸시받던 중국의 국가 존엄성과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낸 인물이었다라고 인정하였다.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속아서 열광하던 중국 국민들은 1950년대 이후 인민공사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광풍(狂風)을 겪으면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가족이 생이별하고 수 천만 명이 굶어죽고 나서야 공산당을 찬양한 과거를 뉘우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11월 말,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장개석은 루스벨트 미국대통령과 처칠 영국수상과 회담석상에서 일제의 식민지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연합국수뇌들에게 주장하였고, 종전 후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청나라 때부터 중국의 속방이던 류구(流球) 즉 오키나와(冲繩)는 일본에게 넘겨주면서도 말이다. 당시 루스벨트와 처칠은 일본패망 후 전후처리에서 한국 문제는 안중에 없었고, 특히 처칠은 한국의 독립을 극구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이 독립하게 되면 영국의 최대 식민지인 인도독립 문제가 당장 불거지기 때문이었다. 처칠의 반대를 꺾은 사람이 바로 장개석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의 장개석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든지 간에 한국인들은 남과 북을 막론하고 독립의 최대 은인(恩人)인 그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장개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중국 내에서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만일 미국의 원자폭탄이 아니었다면 김일성도 중국인이 중심이 된 ‘동북항일의용군’ 소속으로 만주에서 빨치산을 더 오래 계속해야만 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북한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북한동포의 고혈(膏血)로 아들 손자 놈까지 정권을 독점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준 미국에 감사해야 한다. 스탈린의 소련은 일본을 항복시키고 김일성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줄 수가 절대로 없었다. 입만 열면 ‘미제(美帝) 미제......’ 하는 북한정권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20년대 중반부터 군벌통합(북벌)을 진행하면서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장개석은 참으로 힘든 고난의 시기를 인내로 참으며 굴하지 않는 의지로 헤쳐 나갔다. 안으로는 각지의 군벌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 동시에 최대의 적인 공산당과 맞서면서, 밖으로는 중국침략을 본격화한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일본군과 맞서야 했다. 또한 일본이 중국내에 세운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 괴뢰정권과 남경 괴뢰정권 모두를 상대해야 했으니 1대 4의 대결이었다.


장개석은 공산당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안내(先安內) 후양외(後攘外),’ 즉 일본(外)을 이기자면 반드시 국내의 공산당(內)을 먼저 척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가 공산당 토벌작전을 할 때마다 일본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본토를 화북 화중 화남 3방면에서 침략해 들어간 것이다.


이 때를 놓칠세라 공산당은 교묘한 선전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장개석을 대일전으로 내몰리도록 하면서, 민심이 국민당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도록 이간질 수법을 사용하였다. 공산당의 선전은 먹혀들어갔고 민심은 반 국민당 친 공산당으로 돌아섰다. 순진하게도 그 당시 민중들이 공산당을 믿었던 결과, 악마의 유령은 10년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30년 동안이나 중국 상공을 배회한 것이다. 지금의 한국(남한) 국민들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당시 견디기 힘든 상황을 인내로 견뎌내던 장개석은 일본정부에 성명을 발표하였다. 성명문의 제목이 ‘일본은 중국의 적인가 친구인가’라는 제목이었다. 장개석의 눈에는 아시아에 야욕을 가진 소련 공산당과 소련세력을 등에 업은 공산당이 장차 중국을 차지하게 되면, 이것은 중국뿐만 아니고 아시아 전체의 화근이 될 것임을 예견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반드시 일본에게도 미칠 것이므로, 일본과 중국은 적이 아닌 친구의 입장에 서서 방공(防共)을 공동의 국책으로 정해 전쟁을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할 것을 역설하였다. 역사는 장개석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일본은 소련에게 점령당한 북방 4개 도서를 구 소련연방이 무너진 아직까지도 러시아로부터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무릇 지도자는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미래에 닥칠 대국적인 환난이 무엇이며 우환이 어디에서 생길지를 예견하고 미리 대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꼭 지도자가 아니라하더라도 사람은 원견(遠見)을 가져야 한다. ‘사람이 멀리 내다보고 염려하는 바가 없으면 조만간 필히 우환이 닥친다(人無遠慮, 必有近憂)’는 말이 있다. 작게는 가정의 가장으로부터, 각종 단체의 대표 수장, 공직자 나아가 국가의 지도자에게 공히 적용될 말이다.


근자에 오클랜드 한인회장과 오클랜드 분관 총영사 사이에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인터넷 신문을 통해 세계 널리 퍼졌다고 하니 오클랜드에서 거주하는 한국인으로서 창피한 느낌이 든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오클랜드 분관에서 총영사가 모 단체의 대표와 임원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오클랜드 한인회 회장의 대표성 유무에 대한 언급이 발단이 되어 비약된 결과라고 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설령 본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할지라도 미치는 파장은 예사문제가 아니다.


본국에서 공무원 신분으로 파견되어 부임한 총영사의 직책은 현지 오클랜드 한인회의 회장의 대표성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아무런 ‘권한’(Authority)이 없다. 한인회 회장의 대표성 부여권한은 오직 회장선출에 투표권을 가진 오클랜드 거주 한인들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마치 국무총리가 국회의장의 국회대표성 여부에 대하여 왈가왈부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그럴만한 직책에 있지 않으면 그 소관사항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不在其位 不謀其政)’라고 말하였다. 공자의 말은 관료조직의 객관성 유지와 권한 분계에 대한 예리한 정문일침(頂門一鍼針) 이다. 총영사의 본분은 정부로부터 외교관으로서 부여받은 직(職)과 책(責)이 엄연히 있는 것이고, 따라서 직분에 상응하는 책임을 다 하도록 권(權), 즉 총영사로서 부임지에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직책을 앞세워 소관사항이 아닌 일을 도모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


부임지에서 총영사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많을 것이다. 그러한 권한들은 임지에서 본국정부를 대표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권한이다. 그러나 권한을 행사하기 전에 먼저 직과 책을 다해야 한다. 직과 책과 권한 사이에 구분이 분명해야 한다. 또한 부임 후 현지교민 사회의 사정을 아는데 일부의 의견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골고루 청취해야 한다.


나는 가끔씩 뉴질랜드의 국제외교학회 저널지 <New Zealand International Review>에서 일본을 포함한 뉴질랜드 주재 각 국 외교관들의 기고문을 접할 때가 있다. 그들은 외교관이면서도 전문 학자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학구열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의 외교관이 기고한 글은 보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파견된 공무원은 할 일이 없거나 업무를 제쳐두고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가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 사용을 빌미로 현지교민 위에서 군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또한 본인의 책임을 부하 공직자에게 떠 넘겨서도 안 될 것이다. 행정학에서는 현대사회의 관료조직을 거대한 공룡에 비유하기도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관료조직은 보스가 지은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보스를 대신하여 감옥을 가는 조폭조직과 같을 수는 없다. 발단된 문제의 사후처리 또한 어설프게 행해져서도 안 된다. 사람들의 보는 눈들이 있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이름과 업적은 오래 남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국에서 파견된 공직자 관료로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임지에서 교민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교민들 간에 화합하고 협력하도록 행정적으로 도우며 각종 민원을 해결하고 본국정부와의 소통을 해결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불필요한 시비로 교민사회의 화합을 저해하고 분열을 조장시킬 수도 있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될 말이다.


바람직한 총영사와 한인회장의 관계는 적이 아니라 친구관계여야 한다. 총영사도 재임기간이 있고 한인회장도 재임기간이 정해져 있다. 총영사나 한인회장이나 모두 현재의 자리가 평생직책이 아니다. 물론 사람이니까 개인에 따라 인격과 성향, 대인관계의 기준, 사리판별의 우선순위와 기준 선호도 등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사적인 이유나 개인적 감정의 차이를 두고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두 직책에 공통되는 점은 현지 교민의 복지증진과 화합도모에 있다. 아무리 나쁜 상태에 처한다하더라도 두 직책은 적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당사자는 물론 교민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겨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먼 장래를 내다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필자는 오클랜드 분관의 권위나 행정조직의 존귀함과 관료의 존재가치를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한국을 떠나 이곳 현지에서 만난을 극복하고 적응하며 생업을 일구고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는 한국인들이 인격적 존엄과 자존심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고, 뉴질랜드 사회의 일원으로 한인 공동체가 자긍심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한인회와 오클랜드 분관은 협력하여 대인다운 풍모를 보여 주시길 재차 당부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다.

박 인 수

2012. 2. 29                       


Articles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