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에서
행19:1-10
1.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여 사역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복음은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하여 전파되기 시작했고 에베소에도 복음을 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요한의 세례였다. 바울은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회당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하여 석달만에 회당을 나와 셀수스 도서관이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새롭게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2.
이미 바울의 전도여행은 탄력을 받고 있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복음이 전해지고 또한 바울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또한 바울의 전도로 수많은 교회가 이미 세워져서 소아시아의 복음사역은 어느정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에베소는 아직도 별개였다. 여전히 그곳은 우상의 도시였고 바울에게는 배타적인 곳이었다. 회당에서 바울은 똑 같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같은 동족에게서 배척을 당하고 삼개월 만에 철수하고 만다. 그래서 택한 곳이 두란노서원이었다. 이곳은 에베소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강론하고 그리고 그 강론을 즐기는 곳이다. 선선한 아침시간에는 명성있는 헬라교사들의 강론으로 시간이 다 잡혀있다. 그래서 바울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람들이 찾지않는 낮시간이다. 오전에는 바울은 장막을 깁는 일을 하고 낮시간에는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다. 인적이 사라진 두란노에는 정적만이 그를 반겼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외면적 현상에 대해서는 도무지 반응이 없다. 그래서 그의 감정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가진 복음의 열정과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방해하거나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열정은 환경에 절대로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환경을 끌고 나가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최근 모든 일이 일시적으로 정적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마치 바울이 두란노에서 마딱뜨린 처음의 그 정적감과 비슷하다. 꿈틀거린다. 소외감, 거절감, 수치심... 잠자고 있던 내면의 상처의 뿌리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정서적 역기능들은 두려움을 무기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얼른 두란노로 향하기 시작한다. 바울이 직면하는 그 두란노의 정적을 나도 같이 직면하고 싶다. 그리고 무심한 듯한 모습으로 분주하고 바쁜 오전시간을 장막을 깁는 일을 해보고 싶다.
이 아침에 두란노의 정적 가운데서 새로운 마음을 만나본다.
3.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아침은 네가 두란노의 정적 가운데 서 있구나... 장하다. 무력감이나 거절감에 주저앉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정적 가운데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고 있구나.... 그렇다. 너의 열정은 바울의 열정과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너의 가슴은 더 뜨거울 수도 있다.
그렇게 다시 일어서고 그렇게 다시 시작하자...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 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4.
아버지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나 두란노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로 정적만이 남아있는 두란노 서원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하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사도가 그 정적을 이겨낸 것 같이 제게도 새로운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열정이 아버지를 향한 한없는 사랑만으로 지속되게 하소서...
이 아침도 아버지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