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20년쯤 지났을 때, 매우 영리하고 독특한 학자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사도 바울의 서신’으로 잘 알려진 그의 글들은 당시 유대와 갈릴리 땅을 넘어 이방인 지역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교회들에게 편지로 전해졌습니다.
유대인의 혈통과 로마인의 시민권을 아울러 갖고 있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도 아니었고 한 번도 예수님을 직접 뵈었거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독특한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전통과 그리스 철학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로마제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그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익숙한 언어와 비유로 ‘예수 사건과 의미’를 소개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비극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사의 정점이며 죄와 악에 대한 영원하고 궁극적인 승리였습니다.
복음서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기록된 바울의 이런 가르침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에 더없이 쉽고 만족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처럼 처절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고, 다만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에게 기대는 것으로 충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멸되고 구원을 받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옛 종교의 무거운 율법은 사문화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성인과 유아 등 모든 차별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모든 사람은 완전히 평등하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오직 그분을 믿기만 하면!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로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며, 현실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저 하늘나라에서 주님 품에 안기면 그 모든 고통과 애곡과 눈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그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힘없고 체제에 눌리고 착취당하며 살아가던 연약하고 가난한 민중에게 현실의 질곡을 넘어 삶에 소망을 불어넣어주는 최상의 복음(Good News)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구원의 길은 “오직 그분을 믿기만 하면!”이었지만 그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논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온 해석은 예수님의 대속과 구세주 되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와는 매우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강조한 ‘오직 믿음’은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교리적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 정치적 속박을 뛰어넘어 자유와 해방을 선포한 ‘그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 믿음이 바로 이 세상의 온갖 핍박과 고난을 뚫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해석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 해석이 옳다면) 사도 바울이 ‘교리의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