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1. 신은 존재라기보다 우주와 자연의 원리이고 법칙이다
내가 생각하는 신의 속성은 존재의 궁극이며 우주의 원리다.
동양철학이 말하는 이(理)나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 종교를 떠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연법칙과 다르지 않다.
신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이치나 법칙이라면, 그에게 우리가 바라는 그 무엇을 이루어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내가 전통적인 방식의 기도를 멈춘 건 이런 생각이 확고해진 다음부터였다.
나는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하면 순리를 따라 살고자 노력하며, 어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물음을 나 스스로에게 자주 묻곤 한다.
나는 내 인생에 아픔이 찾아올 때, 신에게 기도하기 보다는 깨어있는 이성으로 맞서고 싶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다.
또한 나는 매 순간순간 순리(기독교 용어로는 하느님의 뜻)를 따라 살고 싶다.
신을 의인화하여 의탁하기 보다는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나로서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내가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 아니 지나칠 정도로 거부감을 갖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제도권 목사였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이유로 나는 기도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밝히기도 어려웠고, 교우들이 원하는 방식의 기도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도의 효험을 믿지 않는 사람의 기도가 효과를 발휘할 리도 없었겠지만, 교우들은 내가 기도해 준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노라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나는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괜찮고 매력적인 교회를 갑자기 떠났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사실 기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명목상의 직책은 신학연구원 겸 사무국장이었지만 실제로 내가 맡은 주임무는 목회였다.
그런데 기도가 부담스러워 심방을 미루었다가 교우의 가족이 돌아가신 일이 발생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런 사람이 조직교회의 목회를 담당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라는 내 내면의 물음에 답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2.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는 모든 전제에 저항하며
기도라는 건 보수와 진보를 떠나 기독교 공동체라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 위치에 있다.
차라리 교리와 성서는 버릴 수 있어도 기도는 버릴 수 없는 신앙공동체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오래 동안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감히 기도에 대해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유다.
하지만 '기도'라는,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하며 신앙의 필수요소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이천년 전 원시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는 않은 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을 살아있는 인격이 아니라 우주와 자연의 원리와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섭고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신을 의인화하여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허무한 의타심을 불러오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서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기꺼이 고독하고 외로운 자립을 선택하는 것이 어떨까?
나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이며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인생에 아픔이 찾아올 때 신에게 기도하기 보다는 깨어있는 이성으로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받아들이며, 순리를 따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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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써 산들바람님의 '하나님은 개인의 生死禍福 에 관여하시는가 ?' 를 모두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의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 은 글을 올린 날짜입니다.
1. 하나님은 개인의 生死禍福 에 관여하시는가 ? (8/5)
2. 가슴 아픈 추억의 기도 (8/16) ; 2 & 3 의 순서가 바뀌었음
3. 자연의 법칙은 그 자체에 충실할 뿐 (8/12)
4.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 (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