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상화하고 인격화하여 기도하는 행위가 우리의 정신과 삶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우주의 원리나 법칙으로 이해하면 스스로 순리를 따라 살고자하는 의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체로 생각하고 우리의 생사화복에 영향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면 그에게 매달려 부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인격체요 창조주이며 전능자로 파악한 기독교의 전통적 하나님관이 옳다면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피조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 그에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부탁하는 행위야말로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인식하는 하나님이 옳다면 기도라는 행위는 별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고 나약한 삶을 살도록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에게 전통적인 방식의 기도는 당연히 불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기도와 관련하여 나는 매우 가슴 아픈 추억을 갖고 있다.
1997년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함께 근무하던 학교의 교사 한 분이 간암 판정을 받고 불과 서너달 만에 별세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그때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개인의 생사회복에 관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그에게 매달리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병에 대처해라.
고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판단되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가족, 또한 주변을 위해 남은 생을 잘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고, 교목이었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병상의 그를 찾아가 위로하였다.
내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그와는 너무도 달랐지만 그의 기대가 간절했기에 그의 하나님에 맞추어 기도해 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자녀 넷을 둔 그가 원하는 기도는 "반드시 건강한 몸으로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그의 기대에 맞추어 기도해주었고, 기도가 끝나면 거짓확신을 얼굴에 담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죽어가는 그의 얼굴을 석 달 동안 고통스럽게 대면해야 했고 병실을 나설 때마다 한없는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떠난 이후, 차라리 내 소신대로 말해주었다면 그 스스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거나 훨씬 편하게 임종을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당시의 나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단 소속 목사이며 학교 교목이었던 내가 소신을 밝혔을 경우에 따라올 결과는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