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궁극의 신, 즉 우리의 하느님이 과연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거나 그것에 관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러면서도 곤궁에 빠진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한다면, 나는 그 신을 용서할 수 없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표현하는 그대로 신이 '사랑의 하느님'이며 '전능자'라면, 신은 자신을 애절하게 찾는 모든 사람의 기도에 (적어도 그 기도가 진정이 담긴 기도라면)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열심히 살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억울하게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없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경우에 따라 기도 내용을 가려, 어떤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고 다른 사람의 기도는 외면하는 신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 성서에, 이런 문제로 신과 치열하게 씨름한 기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욥기는 그 대표적인 책이다.
그러나 욥기는 결국 신에게 무력하게 항복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의 결론은 허탈한 웃음을 머금게 만든다.
"하느님이 욥을 이전보다 갑절로 축복하셨다."는 것이 그 유치한 결론인데, 재산을 배로 되돌려주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해주고 싶다.
문제는 죽은 자식들보다 배나 많은 아이를 다시 낳게 해 주었다는데, 그렇다면 죽은 아이의 인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욥기 이외에도 부분적으로 전통 신관에 대들고 항의하는 기록이 성서 여기저기에 나오기는 한다.
아브라함이 소돔성의 멸망을 예언하는 하느님의 천사에게
"선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항의하는 장면이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외쳤다는 외마디 비명,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호소 역시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정직하게 세상을 살펴보면, 사고도, 죽음도, 억울한 일도, 예기치 않은 행운도, 선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점에서 공평하다.
힘없는 사람이 힘있는 자에게 대들면 그 종말이 비참해진다는 것도 넓게 보면 자연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성서 속의 예수는 그 이치에 도전했기에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내가 이 어리석은(?) 레지스탕스를 좋아하고 지금도 여전히 내 인생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유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불굴의 정신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었고, 그것이 바로 그가 나에게 베푼 구원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그 법칙 자체에 충실할 뿐 사람의 기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몇 년 전 동남아시아를 덮친 쓰나미도, 뉴올리언즈를 강타한 허리케인도 그저 자연의 흐름과 법칙에 따른 결과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왜 하느님이...?"라는 허무한 물음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다.
그냥 과학과 합리에 의해 대처하면 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떠벌리는 김아무개 목사의 헛소리에 휘둘릴 이유도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