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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의 세상이야기 (19) : 막걸리 찬가를 소개합니다.

by 제임스앤제임스 posted Nov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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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 녹아 있는 諧謔(해학)風流(풍류)가 있다.

● 대쪽 같은 선비도 엄격한 굴레를 풀어헤치는 부드러운 술이 있기 때문이었다. 

막걸리는 보드카와 같은 술이다. 다른 과일주나 약주, 가향주(加香酒)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고 은은한 맛이 있다. 그래서 봄에 막걸리 안주로 산채를 곁들이면 싱그런 산나물의 향기가 그대로 미각을 돋우었다. 막걸리는 제 색깔이 옅어 다른 것들을 살려주는 포근한 술인 것이다.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에겐 막걸리는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주모(酒母)가 독에 가득 찬 희뿌연 막걸리를 바가지로 휘휘 저어 찌그러진 누런 주전자에 부어 건네주면 떠들썩한 모주(謀酒)꾼 친구가 사발로 가득 따라 대포를 돌리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그저 막걸리만큼은 누구나 똑같이 마셔야 되는 줄 알고 퍼댔던 일이 꿈만 같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고 나면 막걸리는 술꾼들을 배우로 만들어 으슥한 대폿집은 드라마 세트장이 되곤 했다. 그곳에서는 막걸리에 의해 시인으로, 철학자로,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학생들이 세상의 이치를 나름 꿰어 맞춰 읊조리곤 했다.
  
통금(
通禁)이 가까워 오면 막걸리로 위하여건배를 하고, 세상을 개혁하자고 크게 외치면서 일어섰던 젊은 혈기가 새삼 느껴진다. 이제 약 30년간 떨어져 지냈던 옛 친구 막걸리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본다.
  
영양소가 풍부한 새참이었기 때문이었다.
  
막걸리는 농사일을 돕는 소 같은 존재였다. 금강 하구 너른 들에서 논매기하며 들판에서 마시던 막걸리와 농부 이야기를 작가 채만식(
蔡萬植)은 이렇게 표현했다.
  
빽빽한 막걸리를 큼직한 사발에다가 넘싯 넘싯하게 가득 부은 놈을 척 들이대고는 벌컥벌컥 한입에 쭈욱 다 마신다. 그리고는 진흙 묻은 손바닥으로 입을 쓱 씻고 나서 풋마늘대를 보리고추장에 꾹 찍어 입가심을 한다. 등에 착 달라붙은 배가 불끈 솟고 기운도 솟는다.” (소설 ‘
濁流 중에서)
  
농부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분발하여 일을 하는 데 막걸리는 고(
)에너지원의 영양식이었다고 할까? 막걸리는 간식으로서 그저 그만인 음료였던 것이다.
  
대학 시절 풍경이 떠오른다다니던 학교 뒷담 모퉁이에는 주점이 하나 있었다. 당시 50대 주모는 새벽에 선짓국을 가마솥에 끓여 놓고 돈은 막걸리 값만 받았다. 우리는 아침저녁 할 것 없이 그 집에서 식사 겸 술을 마시곤 했다
  
우리에게 걸쭉한 막걸리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몽골인들은 마유주(
馬乳酒)를 즐겨 마시는데, 요구르트와 술의 중간 음료로 막걸리와 유사하다. 막걸리는 알코올 도수가 낮아 영양식으로서 또는 갈증을 해소하는데 안전한 음료로서 수천 년 동안 애용되어 온 술이었다. 옛날에는 지하수 샘물을 길어다 마셨는데, 여름철에는 찬물을 마시면 배탈이나 전염병의 위험이 있었다. 이에 비해 막걸리는 알코올이 있어 샘물보다 훨씬 위생적인 음료였다.
  
막걸리는 보통 알코올 농도 6%로써 열량은 100ml 46kcal 정도이다. 생막걸리에는 유산균을 비롯한 몸에 유익한 미생물이 다량 함유되어 있고, 곡물에 있던 미량 원소들이 대부분 남아 있어 영양소가 풍부하다. 고대 맥주가 액체로 된 빵으로 불리었다시피, 막걸리 역시 과음하지만 않다면 일과 후에 마시는 훌륭한 간식이었다.

황희(黃喜) 집안의 명주(名酒) 호산춘(湖山春)이 있었다.

막걸리는 풍류(風流) 교사 같은 존재이다. 추상(秋霜) 같은 재상(宰相), 대쪽 같은 선비도 막걸리 한 잔이면 여유를 갖는 풍류객이 되었다. 조선 중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을 이뤘던 서예가 한석봉(韓石峯 : 본명 한호·韓濩)은 막걸리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짚방석(方席) 내지 마라 낙엽(落葉)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한호는 절개 있는 인물로 꼽힌다. 갓끈을 엄히 매고 도포 두루마기를 단정히 하여 자리를 골라 앉았을 법한 그가 달밤에 낙엽에 앉아 소탈하게 막걸리 잔을 드는 풍경은 상상만 해도 재미있다. 막걸리의 본성은 엄격한 굴레를 풀어헤치는 부드러움이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며 재상인 황희(
黃喜)는 막걸리를 좋아하여 자연을 벗하며 마셨다. 그의 막걸리 예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대초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듯드르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황희 정승에게는 가을 대추가 익어 가는 풍경, 밤이 여물어 떨어지는 풍경, 벼 벤 들판에 논 게가 돌아다니는 풍경, 골목을 돌아다니는 장수가 모두 막걸리 마시는 핑계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장수는 막걸리를 거르는 장수가 아닌가. 이런 황희 정승의 풍류와 여유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태평한 세종시대를 열게 한 철학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황희 정승의 후예들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고유의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어 조상이 즐기던 술의 진미(
眞味)를 계승하고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서 대대로 제조되어 온 민속주 호산춘(湖山春)이 그것이다. 이 술은 대하리 일대에 모여 살던 장수(長水) ()씨 소윤공파 집안에서 가용주(家用酒) 겸 접대용 술로 쓰던 것으로, 솔잎이 첨가돼 솔향이 그윽하고 약리 작용이 뛰어난 명주(名酒). 경상북도는 호산춘 제조법을 1991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푸성귀나 김치와 잘 어울리는 막걸리 술이었다.

★ 막걸리는 야채를 위주로 한 우리 음식에 어울리는 술이다. 조선 인조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채유후(蔡裕後)는 청나라에 항거한 인물이다. 그는 임금께 자기 주장을 펼 때는 목숨을 걸고 대쪽 같은 기개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막걸리를 좋아해 격의 없는 술자리를 즐겼던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다나 쓰나 이탁주 좋고 대테 메운 질병들이 더 보기 좋네/

어룬자 박구기를 당지둥 띄워두고/

아희야 절임김칠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이탁주는 입쌀로 만든 막걸리로, 배꽃이 필 때 담근다고 해서 이화주라고도 불린다.

대테 메운 질병이란 참대로 테를 두른 옹기 질그릇 병을 말한다.

아래 두 소절은 얼씨구, 바가지를 술동이에 둥둥 띄워놓고 마시는데, 아이야. 절인 김치면 어떠냐, 안주 없다 말고 내어 오너라는 뜻이다.

예부터 막걸리는 푸성귀나 김치와 잘 어울렸다.
  
★ 헌종(
憲宗)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3월령에는 봄에 산나물을 뜯어다가 꽃나무 아래서 술 마시는 풍경이 정겹게 그려져 있다

앞산에 비가 개니 살진 나물 캐오리라/

삽주 두릅 고사리며 고비 도랏 어아리를/

일부는 엮어 달고 일부는 무쳐 먹세/

떨어진 꽃잎 쓸고 앉아 병 술을 즐길 때에/

아내가 준비한 일품 안주 이것이로구나.”

시대상 이때의 술 역시 막걸리였을 것이다. 막걸리는 증류주에 비유하면 보드카와 유사하다. 증류주 중에서 칵테일에 가장 많이 쓰이는 술이 보드카이다. 보드카는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한 술이다.

보드카로 칵테일을 만들면 다른 재료가 갖고 있는 향과 맛이 그대로 발휘되기 때문에 좋다. 막걸리는 보드카와 같은 술이다. 다른 과일주나 약주, 가향주(加香酒)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고 은은한 맛이 있다. 그래서 봄에 막걸리 안주로 산채를 곁들이면 싱그런 산나물의 향기가 그대로 미각을 돋우었다. 막걸리는 제 색깔이 옅어 다른 것들을 살려주는 포근한 술인 것이다.   
  
● 김삿갓과 시큼한 신 막걸리가 있었다.

막걸리는 여행객들에게 쉼터와 같았다.

김홍도(金弘道)의 풍속화 주막을 보면 나그네 한 사람은 식사 후 곰방대를 피우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허겁지겁 국밥을 먹고 있다. 한편, 주모는 술동이에 막걸리를 휘휘 저어 대폿잔에 술을 뜨려 하고 있다.

아마도 나그네들은 먼 길에 술 한 잔 하고 쉬어 갈 것이다.

나루터나 고개 아래 또는 갈림길에는 주막거리가 있고 그곳에는 나그네들의 허기를 달래 주는 막걸리가 있었다. 막걸리는 먼 길에 지친 나그네를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쉬게 해 주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해학(諧謔) 넘치는 막걸리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김삿갓이 어느 여름날 주막에 들러 주모에게 대포 한 잔을 청했다. 주모는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시큼하게 신 막걸리를 한 사발 내놓았다. 김삿갓은 더운 터라 허겁지겁 한 사발을 들이켰는데, 그 맛이 시금털털했다. 김삿갓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고 탁주 값을 물었다. 주모는 탁주 값이 두 닢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김삿갓은 주모에게 네 닢을 주었다. 주모는 얼떨떨하여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김삿갓이 말하기를 “두 닢은 탁주 값이요, 나머지 두 닢은 초 값이요” 하였다. 막걸리는 해학과 인정, 그리고 안식을 주던 나그네들의 영원한 동반자였다.” 

조선시대 말까지 농민을 비롯하여 정승까지 온 민족이 즐겨 왔던 우리 민족의 술 막걸리는 일제에 의해 철퇴를 맞았다. 1909년 주세령(酒稅令)에 의해 가가호호(家家戶戶) 전해 오던 나름의 비법은 사라지고 일제에 의해 도입된 개량식 막걸리로 변질된 것이다. 조상 대대로 지켜 내려오던 가양주는 밀주(密酒)로 전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른바 밀주 상감(단속원을 일컫는 말)이 떴다 하면 막걸리 항아리를 두엄(퇴비더미)이나 잿간(땔감으로 땐 나무재를 모아놓은 곳)에 묻어서 봉변을 모면하곤 했다. 이런 현상은 1960년대 양곡령(
釀穀令, 곡식으로 술 빚는 것을 금지한 정책)이 내려지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아기가 울 때 “상감이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로 밀주 상감은 무서운 존재였다. 1990년대에 자가소비 가양주가 양성화되어 가정에서 술 빚는 일이 겨우 단속 대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 명품(
名品) 막걸리의 조건이 우리에겐 있었다.
  
막걸리는 “마구 걸렀다”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모주(母酒), 동동주, ()대포, 젓내기술(논산), 탁배기(제주), 탁주(경북)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막걸리는 멥쌀이나 찹쌀을 주원료로 하고 누룩을 사용해 제조해 왔으나 1963년 양곡령이 내려진 이후에는 밀가루로 대체하게 되었다
  
1960~70
년대는 양조장 막걸리의 전성기였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들이 장성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고향을 떠나 산업 전사로서 도시 생활에 적응하는 데 막걸리는 일상의 힘든 노동에 휴식을 제공하는 먹을거리 대용으로 소비되었다
  
1980
년대부터 막걸리 산업은 맥주와 희석식(
稀釋式) 소주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경제 성장과 세계화에 떠밀린 막걸리의 퇴조는 양조업자 스스로도 반성할 부분이 많다.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이 혁신을 거듭하고 있는데 막걸리 양조장은 아직도 일제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경영되고 있다. 쉬운 예로 국내 막걸리 발효조(醱酵槽, 발효시키는 용기)는 대부분 뚜껑이 없는 개방형이다. 그 동안 어떻게 하면 더욱 맛있는 막걸리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나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일제시대부터 70~80년 동안 지방의 유지로 군림해 오던 막걸리 양조장은 재투자 없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막걸리는 2009년부터 다시 붐을 타고 있다. 정부의 쌀 소비정책에서 비롯되었지만 막걸리 마시기가 복고풍 퓨전 소비문화로 자리 잡을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나는 1976년 겨울 청진동에서 급우들과 함께 쌀 막걸리를 마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입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막걸리가 판치던 시절에 출시된 우리 쌀 막걸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막걸리가 맥주와 소주 그리고 와인과 위스키의 틈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명품이 속출해야 할 것이다.

★★★ 명품의 조건은 세가지가 있다.

★ 첫째 조건에는,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좋은 원료가 명품의 첫째 조건이다. 프랑스에서 명품 포도주의 가격이 원료의 생산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명품 막걸리가 되려면 좋은 물, 좋은 쌀, 좋은 누룩이 필수 조건이다. 그 지방에서 나는 좋은 햅쌀로, 그 지역의 좋은 양조용 샘물과 장인이 배양한 누룩을 사용한다면 명품 막걸리가 아니 나오고 못 배길 것이다.
  
★ 두 번째 조건에는, “양조 기술과 설비이다. 맥주나 와인 같은 증류주 제조 기술을 원용한 현대의 양조 기술로 막걸리도 한층 맛깔스럽고 경쟁력 있게 제조할 수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기존 유럽의 양조 기술에 현대적 맥주 제조 기술을 접목하여 제조한 와인이 오늘날 유럽산 최고급 와인과 어깨를 견주게 된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누구나 하는 방법만으로는 명품이 나올 수 없다. 지난 30년간 세계 유수의 양조 연구소에서 연구개발한 그들의 실험 정신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질 좋은 술,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는 술을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하며 혁신하고 있었다.
  
★ 셋째 조건에는, “퓨전 문화의 창달이다.
오늘날 변화의 홍수 속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적 요소를 현대의 흐름에 맞게 본질을 지키면서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막걸리가 갖는 포용적, 풍류적 문화를 현대의 감각으로 재포장하여 문화로 자리 잡게 해야 할 것이다. 위생적 용기에 튀는 디자인, 그리고 해학이 넘치는 음용(飮用) 방법의 개발이 필요하다. 주점에서, 제조업체에서, 각 지방에서 또는 해외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막걸리 음용 문화의 변신 노력이 결실을 맺기 바라는 마음뿐이다.

수채화아티스트/기도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 제임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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