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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by 박인수 posted Nov 0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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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 죄를 짓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기독교의 원죄사상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보소서, 제 어머니가 죄 중에 저를 배었나이다.’라는 구약 시편(詩篇)의 구절이 있듯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 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혈기방장하고 신앙심이 부족하던 젊은 나이에 나는 이 구절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 죄가 있다니!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게 죄가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람이 살면서 짓게 되는 죄의 종류를 나누자면 인간 행위의 다양성과 똑같이 많을 것이다. 인간이 짓게 되는 죄는 크게 나누어, 실정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죄, 교회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 종교상의 죄, 도덕률과 양심에 의해 가책을 받게 되는 죄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실정법을 어긴 죄는 국가가 정한 ‘죄형법정주의’에 의해 모두 벌을 받게 되어있다. 종교법을 어긴 죄도 시대에 따라 처벌되는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도덕과 양심에 저촉한 죄는 반드시 죄과를 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사람이 짓게 되는 죄의 원천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인간 존재의 나약성에 있다고 본다. 인간존재의 나약함은 바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준 위대한 ‘이성’의 또 다른 일면이다.


인간의 타고난 생물학적 ‘자연본성(Human nature)’은 죄를 짓기 쉽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본성(Human essence)은 인간을 양심과 도덕의 길로 이끄는 힘이 있다. 죄를 짓고 살 것인가 죄를 짓지 않고 살 것인가는 순전히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잠재해 있는 본성 중 생물학적 본능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도덕본능을 따를 것인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생물학적 본능에 이끌리게 되면, 나와 남들과의 비교에 따라서, 장단, 고저, 미추, 빈부,...... 등등, 인간사회의 모든 상대적 가치 우열에 의한 생활을 영위하게 하여 쉽게 죄악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반면 정신적 수양과 인격의 내면적 함양을 위한 인내로 고행하는 수행자들이나 성현, 교회의 성인 반열에 오른 원숙(圓熟)한 인격을 이룬 성인들은 대부분 모범적인 도덕본성의 길을 걸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짓게 되는 죄는 법에 의해 처벌받거나 피해자의 관용에 의해 용서될 수가 있다. 그러면 인간이 신(神)에게 짓게 되는 죄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편의 고사를 인용해 보자.


공자가 위(衛)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당시 위나라의 실권자인 왕손가(王孫賈)라는 인물이 공자가 자기를 찾지 않고 허울만 남아있는 국왕을 찾아가자, “안방에 빌붙느니 부엌신에게 빌붙어라.”는 속담도 모른다고 공자를 힐책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게 된다.(獲罪於天 無所禱也!)” (論語, 八佾篇) 라고 되받았다. 공자가 논어에서 자주 빗대어 말한 ‘하늘(天)’은 종종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인간만사를 주재하는 신에 해당한다.


공자가 본 무도한 실권자인 왕손가는 ‘하늘(神)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공자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하늘에 죄를 지은 것이니 더 이상 어디에다 빌어볼 곳이 없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사람이 짓는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달리게 된다.(마르코 3, 28-29)”라고 하였다. 사람이 짓게 되는 죄에는 신성모독죄까지 포함된다.


예수님 생전의 많은 율법학자들은 그의 기적에 동참하는 성령을 믿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여 비방한 것이다. 그러나 한 때 성령을 모독했다하더라도 곧 잘못을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기적에 동참하면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왕손가도 자신의 무도함을 깨닫고 정도를 걸으면 하늘의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빌 곳이 없는 죄의 죄목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공인(公人)이나 공적(公的)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는 짓을 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과거 일국의 대통령이 직위를 이용해 기업가들로부터 수 천 억의 돈을 사취해서 챙기는 경우가 있었다.


가깝게는 오클랜드에서 공적인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명예욕에 눈이 멀어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도 거기에 해당한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1990년대 중반 오클랜드 한인사회에서 2세 한글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할 당시, 전체 한인들의 염원을 무시하고 사적 명예욕에 눈이 먼 나머지, 오클랜드 총영사관(초대 총영사 故 김상훈 님)의 간곡한 수차례 부탁을 물리치고 한국학교와 한민족학교로 분열시킨 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교민들의 소망인 한국학교 교사 건립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몇몇 인사들의 행동을 세월이 흐른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늘에 죄를 지은 경우라고 본다. 그들이 한인사회에 끼친 폐해는 계산상으로는 다 따질 수 없다.


노스쇼어(North Shore) 시의회(현재는 광역 오클랜드시의회에 합병)에서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노스쇼어(North Shore) 소재 공원에 ‘코리안가든’ 설립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한지 수년이 지났다. 이에 뜻있는 분들이 의욕적으로 앞장서서 ‘코리안가든 트러스트’를 구성하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코리안 가든 장래 사업추진에 의심이 드는 말이 들린다. 코리안가든 트러스트는 ‘한인사회의 지지여부와 관계없이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로 일을 추진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매우 위태로운 발상이라고 본다.


시의회는 전체 오클랜드 한인들을 위해 공원 부지를 제공한 것이지, 코리안가든 트러스트를 위하여 부지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은 필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일부 인사들은 “그럼, 코리안가든 트러스트 구성원 자기네 주머니에서 돈을 갹출하여 짓고 자기네들이 사후 관리를 하도록 하라” 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비판적인 언사도 사업추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이다. 한인 모두의 의지와 힘을 합쳐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일이다.


만일, 크게 먼 장래를 내다보고 코리안 가든 설립을 매끄럽고 성공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면 뉴질랜드에서 지금 우리세대 뿐만 아니라, 후세들과 한국의 국가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사자들이 지은 죄는 실정법을 어긴 죄는 아니지만 ‘빌 곳이 없는 죄’를 짓게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의(大義) 앞에 사사로운 명리(名利)와 명예(名譽)는 죽여야 한다. 그 길만이 바로 나도 살고 함께 같이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코리안가든 트러스트’ 관련 당사자와 뜻있는 교민들이 마음을 열고 함께 머리를 맞대어 지혜를 모아야 할 일이라고 심히 믿는 바이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박 인 수


(201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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