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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리(義理)

by 박인수 posted Aug 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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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리(義理)



기원전 403년은,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해가 아니지만, 중국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연대이다. 바로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원에서 가장 막강하던 진(晉)나라의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3명의 대부(大夫) 즉, 조(趙)대부· 한(韓) 대부· 위(魏) 대부가 사직의 이익보다 개인 가문의 이익을 앞세움으로 분열해 진나라가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의 3개 나라로 쪼개지던 해이다.


이로써 중원이 약화되자 이제까지 서쪽 변방의 오랑캐 나라로 멸시받으면서도 착실하게 내실을 키워왔던 진(秦)나라가 절호의 기회를 맞아 이들 세 나라를 하나씩 멸망시키면서 중원으로 동진하여 결국 진시황(秦始皇)의 중국통일에 기반을 제공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를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문헌과 비교하면, 대략 역대기의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시대와 맞먹는 BC 5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걸친 이야기이다.


고대 중국의 역사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닮은 곳이 아주 많다.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사상적 차원에서도 유사한 점이 많다. 우연의 소산인지 고대 중국학문의 총집합인 6예(詩·書·禮·樂·易·春秋)와 비교해보면 구약의 내용은 당시 중국인들의 사상의 상징구조에서 닮은 점이 많다. 다만 역사적으로 기록의식이 다른 민족에 비해 뛰어나고 문헌학이 고대부터 일찍 발달한 중국인들은 이를 6가지로 분류해서 체계적으로 기록해 놓은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영역별로 분류하지 않고 구약 한권에 집합시켜 놓은 것일 뿐이다. 혼재하지만 구약에도 시· 서· 역사· 예언· 문학 등이 모두 들어 있다.


진(晉)나라가 3개 나라로 쪼개지기 직전, 조씨(趙氏) 가문의 대부이자 실권자는 조양자(趙襄子)라는 인물이었다. 조양자의 불타는 야심에 강력하게 맞서던 장군 지백(智伯)의 수하에 예양(豫讓)이란 인물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서론이 길어졌다. 조양자와의 권력투쟁에서 지백은 조양자에 패하였고 가문은 한사람도 남김없이 멸족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예양은 자신의 주군이던 지백을 위해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우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을 하여 조양자 집안의 하인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예양은 조양자 가문에 들어간 후에 남들이 마다하는 변소청소 일을 자청하였다. 호시탐탐 조양자의 목숨을 노리던 중에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비수를 숨기고 화장실에 숨어서 조양자가 화장실에 들어온 틈을 타서 목숨을 노렸으나 인기척을 느낀 조양자의 보디가드에 의해 발각되었다.


끌려나온 예양은 문초 후 신분이 밝혀졌고 그는 죽음을 맞이할 운명에 놓였다. 그러나 조양자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너희들도 이 사람을 본받아라. 자신의 주군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복수하기로 결심한 이 사람의 결사보은의 충정을 너희들도 본받아야 한다.”라고 자신의 신하들에게 강조하고자 한 것이 조양자가 그를 살려준 이유였다. 그리고는 노자 돈을 쥐어주면서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나가라며 그를 내쫓았다.


그러나 예양의 복수심은 이로 인해 사라지지 않았다. 첫 번째 실패 후 재차 복수하기로 결심한 그는 이번에는 얼굴에 문신을 하여 남들이 못 알아보게 철저히 변장한 후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세월이 몇 년 지난 후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잊혀질만한 때가 되자 그는 다시 조나라로 기어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소문하여 조양자가 행차하는 시간과 장소를 알아낸 그는 미리 매복하고 있었다. 조양자가 지나갈 길목의 다리를 살해 지점으로 정하고는 다리아래에 매복하고 있다가, 수레에 뛰어올라 단숨에 내려칠 결심을 하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예양이 숨어든 다리에 접근하자, 조양자가 탄 수레를 끌면서 전방 호위하던 기마병의 말이 사람기척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고 시종들이 주위를 수색하자 한 자객이 끌려나왔다. 상세하게 심문한 결과 전에 한 번 살려준 예양으로 밝혀졌다. 그는 몸이 묶인 채로 다시 조양자 앞에 무릎을 꿀리게 되었다.


“말해 보라. 비록 정적이었지만 주군을 향한 그대의 충정이 갸륵해서 목숨을 살려주었는데 목숨을 살려준 은혜가 주군의 위한 의리보다 못하단 말인가?”


예양은 고개를 들어 조양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고로 태어나서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士爲知己而死)’....... 나의 주군은 보잘 것 없는 나를 알아준 사람이었고 나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리니 아까운 것은 없다. 다만 이제는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없고 죽어서도 주군을 볼 면목이 없으니 그 점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조양자는 마음속으로 저런 인물이 자기 수하에는 없음을 생각하고 살려주고 싶었으나 살려둘 수 없었다. 글리고 죽이기 전에 그의 소원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예양은 주군을 위하여 결심한 복수를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한 후, 조양자가 입고 있는 비단 겉옷을 벗어서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양자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비단 옷을 벗어서 단(壇) 아래로 던지자 예양은 허리에서 칼을 뽑아 조양자의 겉옷을 갈지(之)자로 두세 번 내려 갈기며 토막을 낸 후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하였다.


조양자가 입고 있던 비단옷을 칼로 자름으로써 그에게 복수를 하였고 또한 주군에 대한 의리를 갚은 것이다. 조양자는 예양의 시체를 선비에 대하는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적혀있는 이야기이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말이 조양자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심하고 ‘한번 시작한 일은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는다.(一不做二不休)’라는 중국인들이 자주 쓰는 격언이 있다. 무슨 일이든 간에 뜻을 세우고 나서는 초지일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양의 주군에 대한 의리도 초지일관하고 있다. 비슷한 예를 구약에서 찾자면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저자도 유태인들이 기원전 6세기 경에 망해버린 국가와 파괴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면서 겪게 되는 시련과 고난을 기록하고 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살았던 시대도 대략 중국의 춘추와 전국시대의 교체기와 비슷한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이다.


예양을 비롯한 형가(荊哥, 진시황 살해 미수 자객) 등 자객이야기는 사마천이 지은 역사서 사기(史記)의 역대 제왕열전의 후반부에 나오는데 분량이 아주 작다. 비록 차지하는 분량이 작다고 지니는 비중이 작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가 구약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역대기의 후반에 조금만 편집되어 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리고 성서를 읽는 이들에게 자주 많이 읽히는 부분도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신학적 의미에서 모세오경이나 예언서와 같은 중요성이나, 지혜서나 집회서 같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고 또한 종교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문학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전개되는 이면에 흐르는 주제는 한번 맹세한 약속을 사명으로 지켜나가 마침내 성공시키는 인간적 ‘의리’로 넘쳐흐른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잘 알고 있는 민족이다.


바빌론 궁궐의 고급관리로 편안함과 일신의 영달이 보장되어 있던 느헤미야나, 사제이자 율법학자로 신분과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 있던 에즈라나, 마음만 고쳐먹으면 조양자의 신하로 조나라의 고관을 맡을 수 있었던 예양이나 다를 바가 없다.


20세기 초 대한민국(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기를 산 인물 중에 고종황제의 원수를 갚은 후, 고종황제의 능참봉을 지낸 고영근(高永根)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하고 일본으로 밀항한 후 만난을 무릅쓰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조선인 앞잡이였던 우범선(禹範善, 육종학자 禹長春 박사의 생부)의 암살을 실행으로 옮긴이다. 그가 이룩한 쾌거는 그 당시 나라가 친일파세상으로 바뀌고 일제에 강제로 합병된 후 나라가 망하여 그의 의로운 업적이 밝혀지지 않고 묻혀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고영근의 일생은 실로 ‘예양의 정신’ 즉 주군을 위한 의리정신이 살아있음을 실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의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일은 자주 있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 까닭이라 하겠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그 정신을 우러러 보아야 할 것이다. 한때 지나간 우리역사의 부끄러운 점이라고해서 그것을 그냥 덮어 두어서는 아니 된다.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의 장래는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 ‘지나간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음은 그것이 다가올 역사를 비추어 주는 거울(前史不忘, 爲後史之鑑)’ 이기 때문이다.



(박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