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순 할아버지를 보내며
“추-웅~ 성!”
문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차려 자세로 박창순 할아버지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린다.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계시다가 고개를 돌려 저희를 보시고 인자하신 낯빛과 미소로 맞아주신다.
“응, 왔어, 반가워. 바쁠텐데, 또 왔어.......”
내가 박창순 할아버지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지금부터 약 2년 반 전이다. 그 때는 뉴질랜드의 겨울, 할아버지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친구 분들과 함께 롱베이(Long Bay) 파크로 산책을 가셨다가 넘어지셨다. 구급차로 응급실에 도착하신 후, 온갖 수단을 다 써 보았으나 ‘재활불가’라는 병원의 판정을 받고 오신 곳이 바로, 임종하실 때까지 머문 포레스트힐에 위치한 레스트 홈(요양소)이었다. 그 곳에 계시는 많은 분들 중 손수 거동하시는 분은 한분도 안계시고 식사도 모두 남에게 의존하신다. 할아버지는 거기 모든 분들과 말도 안통하고, 음식문화도 우리와 다른 곳으로 하루아침에 보내지셨다.
처음에는 여성으로 구성된 봉사단체로 연락이 왔으나 할아버지가 남성이어서 불편한 점이 있다는 통보를 받고 저희 남성 레지오가 맡게 되어 봉사를 시작하였다. 할아버지는 그곳의 유일한 한국인이셨다.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앉혀 드리고 요양소 안을 돌 때면 할아버지는 다른 방의 키위 노인들에게 인사를 건네신다. 마주치면 손을 들어 아는 채 하시는 눈웃음이 곧 인사이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눕혀드리고 점점 마비되어 가는 팔다리를 주물려 드리면서 말을 나눈다. 기억력도 오락가락이시다.
“할아버지 아침은 뭘 드셨어요?” “밥하고 국하고 먹었지. 된장찌개도 먹고........ ”
“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얼마세요?” “예순아홉”
“그럼 아드님 나이는요?” “예순둘.”
“할아버지, 군번은요?”
“0178977, 흑흑흑.........”
일생동안 겪으신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가물거리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단 1초의 주저도 없이 나오는 대답 중 가장 확실한 것은 그 옛날 6.25 전쟁당시의 군번이다. 강원도 전선에서 중사로 전투에 임하셨다. 그 다음은 안 여쭈어보아도 알만하다. 군번을 말씀하신 직후 항상 “흑흑흑.........”하면서 우셨다. 왜 그러셨을까?
두세 번 우시는 모습을 본 후로 슬픈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것 같아 다시는 군번을 물어보지 않았다. 뭔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기억력 회복에 도움이 될까하여 한국의 주소를 물어 보았다.
“서울시 종로구 계동 00번지”라고 역시 1초의 주저도 없이 대답하시고는 또 “흑흑흑........”하고 우신다.
할아버지께서 병상에 누워 계시는 동안에 나눈 여러 가지 기억을 되살릴만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 군번과 서울 집 주소, 이 두 가지 대답 뒤에 할아버지는 꼭 우셨다. 군번과 집 주소, 어쩌면 할아버지의 일생을 통하여 그 누구에게도 모두 다 털어놓지 못하셨을 평생의 비원(悲願)이 깃든 ‘숫자와 장소’이었으리라. 내가 빈손으로 뉴질랜드에 이민을 와서 오클랜드에서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 후 아무도 몰래 밤새껏 감사의 눈물기도를 드린 심정이 아마 그것과도 같았으리라.
할아버지는 이북에서 태어나 전쟁 직전에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셨다. 우리에게는 김소월의 진달래로 유명한, 고향 평안북도 영변을 뒤로하고 부모형제를 떠나 홀로 월남하셨다. 그 다음 얘기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아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일생을 동고동락하신 할머니와 사랑하는 아들내외 그리고 손자·손녀와 함께 만년에 이곳 뉴질랜드로 오셨으니 할아버지의 생애는 남쪽으로만 향하신 것이다. 그리고 꿈에서도 잊지 못 하실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하셨고, 죽어서도 못 잊을 부모 형제도....... 생각하면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평소 병상에서 나눈 대화에서 할아버지는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 할머니 몰래 로맨스 있었지요?”라는 물음에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 라고 말해 우리의 폭소를 자아내게 하셨다. 할아버지는 젊으셨을 적에 충무로 영화계에서 생업에 종사하신 적이 있다. 한 해 전부터는 휠체어도 못 타게 하는 요양소 측의 조치로 인해 할아버지는 줄곧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 우리 단원들은 매주 방문 후 주회에서 결과보고를 하고 다음 주에 일을 계획한다.
이제 물리적으로 해드릴 것이 없으니 활동을 중단하면 어떨까라는 얘기도 나왔다. 할아버지 가족이 개신교 신자라 천주교신자들로 구성된 우리들의 방문을 꺼려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었다. 묵주기도 후 묵상을 통하여, 성모님의 뜻은 ‘할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펴드려야 한다’고 결론을 모았고, 그 후로 더욱 정성을 다하여 마치 친부모를 대하는 것과 같이 해드리자는 것이 단원 모두의 마음이었다. 지금 할아버지의 저 모습은 얼마 후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할아버지, 노래한번 할까요? 한 많은 대동강 기억나시죠?”
“응, 기억나.” “같이 한번 불러 볼까요.”
“한~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으냐~~ ” 비록 느리지만 완창하신 후 할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고, 곁에서 지켜보시던 할머니도 모처럼만에 입가에 웃음을 가득 지어 보이신다.
“다음에 올 때까지 할아버지 건강하시고 잘 주무시고 음식 많이 잡수세요.”
“응, 잘 가. 또 봐.”
병자와 가족을 위한 기도를 마치고 방문을 마친다.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모두 깨어나 준비하고 있어라’는 성경구절이 생각난다. 깨어있을 동안에 우리가 할 일들은 무엇인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 올 때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어느 방문 날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하나부터 백까지 셀 수 있으시단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같이, 하나, 둘 셋, 넷에서 시작하여 중간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 아흔 마침내 아흔아홉에서 백까지 세시는 걸 본 것이 운명하기 3주전의 일이었다. 아무도 사람의 앞날을 알 수 없듯이, 운명하시던 날, 소천하기 두 시간 전에 저희 단원이 생전에 마지막 방문을 하였고 더듬더듬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셨다는데, 그날 주회에서 할아버지가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시고 눈동자가 풀어져 있더라는 보고를 하였다.
브라운스베이 소재 광림교회 영결식장에서 손자가 읽어 내려간 할아버지 약력에는, 그동안 할아버지와 나눈 수많은 대화중에서도 듣지 못한 것이 있었다. 고향에서 일본군의 강제징병에 소집당하셔서 2차 대전 막바지에, 중국과 국경을 접한 버어마 전투에 까지 끌려가셨다는 것이다. 즉 중국·영국·인도 연합군이 중국·버어마 국경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식민지 막바지 시대의 일이다. 할아버지는 바로 일제 식민지, 좌·우익 투쟁, 육이오, 보릿고개....,..... 이루 말로 다 형언하기 어려운 민족의 고통을 당하신 분 중의 한분이셨다. 개인적으로 버어마 전투에 대해서 꼭 듣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와 2년 반을 가까이 하면서도 여쭈어 볼 기회를 영영 놓쳐 버렸다.
박창순 할아버지께서는 1924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셨고, 2009년 8월 23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영면하셨다.
주님, 이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곁으로 가신 박창순 할아버지의 영혼을 편안히 쉬게 해 주시고, 살아생전에 못 다하신 여한을 풀어드리시며, 천상낙원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원문 2009년 11월, 오클랜드 한인성당 성가정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