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세이 : 교회를 참석하면 구원이 다 된 줄로 착각하지 않고, 위선과 가식과 교만을 버려야 살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교회를 참석한다고 다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고, 교회를 참석한다고 모두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크리스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봉사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예배에 빠짐 없이
참석한다고 영적으로 성숙함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을 향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열심이라면, 단지 허구요 구실이고 겉치레이고 과시에 불과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이 맞닿아 있습니다. 언제나 매일을 살아 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구하며 믿음으로 주시는 그
분량만큼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마주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히 “성전 중심적인 삶”을 살았고, 열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행함으로 충성을
다한 듯이 보였으나, 버림을 받음은 그들의 믿음생활이 철저히 외식주의이었으며 자신만을 나타내며
사람만을 의식한 자신의 교만으로 집착에 빠진 거짓믿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바이블의 말씀을 단순히 아는 지식으로 형식적인 고백과 의식에 빠져 성전의 마당만 밟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등과 비교할 때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참석하면 구원이 다 된 줄로 착각하지 않겠습니다. 교회를 참석한다고 천국이 보장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참석한다고 저절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은 많으나,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목숨을
바치는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둘째로, 점점 위선과 가식이 가득해지고 세상이 험악해져서, 사람의 완고함 (Stubbornness) 때문에, 때로는 완악함으로 (Wickedness) 변질될 수 있었음을 바이블의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완고함이 변하여 고집이 되고 그것이 믿음처럼 굳어질 때 이것을 바꾸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신념으로
굳어지게 되면 그것이 평생을 따라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고함이 집착이 되어 그 사람을 종처럼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죄악의 완악함을 잘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선교를 해도 믿으려 하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가는 그들은 완고함의 표상인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도, 출애굽 전에 바로왕의 완고함도, 결국 그들을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고함은 죄악이었으며, 자신이 하나님 보다 낫다고 여기는 자신의 우월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함 때문에 지금도 지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의 힘으로는 고치기 힘든 것이 완고함이고, 결국 패역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애의
여정 에서 하나님께 완고함을 보이다가,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히 후회할
길로 떠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자신의 사소하고 작은 것일 지라도 하나님 앞에 완고함으로 고집을 부리면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께 손들고 항복해서 사는 삶인 것이며, 거역은 곧 패망의
지름길이 되는 것이고, 고집은 자신만을 인정하는 교만이요 겸손을 모르는 완악함임을 알았습니다.
교만은 멸망에 앞서 있으며, 거만한 영은 몰락에 앞서 있느니라. 낮추는 사람과 함께 겸손한 영을 갖는
것이 교만한 사람과 함께 탈취물을 (Spoil)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일을 현명하게 다루는 사람은 좋은
것을 얻으니,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니라. (잠언 16:18~20) 그러므로 자신을 꺾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고함은 멸망이요, 몰락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위선과 가식과 교만을 버려야
살 수 있었습니다.
수채화아티스트/기도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 제임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