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으로 일으켜지는 부활
박기호 신부/ 전 서교동 주임사제
알렐루야!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의 마음과 가정에 함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실패와 파산으로 회생의 전망이 거의 보이지 않아 좌절하고 신명을 잃은 분들에게도 부활 승리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어 있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축원합니다.
부활이 간절한 이들을 두 팔로 붙들어 안아 챙기시며 눈물을 닦아주시고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 부활의 기쁨과 신명이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소서. 알렐루야!
어떤 것을 부활이라고 하며 부활의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죽음의 상태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는 건가요?
작가 김팔봉 선생이라고 있는데, 6.25 때 지금의 인민군들이 서울 태평로에서 인민재판으로 몽둥이 타작을 해서 처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밧줄로 다리를 묶어 오토바이에 매달고 끌어다가 왕십리 채소밭 쓰레기장에 버려졌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쓰레기 더미에서 숨을 쉬며 살아났고 작가로 활동하며 35년을 더 사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생물학적으로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죽음으로 오진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살아난 모든 경우는 완전한 죽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부활, 정신적인 부활, 의미론적인 부활로 봐야 하지요.
영의 눈이 아니고선 목격도 할 수 없는 것이 부활입니다. 생물학적인 부활이라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반대자들 앞에 한번만 나타나셨다면 문제는 끝났겠지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인간으로 육화 강생하셨던 역사에 실존하는 인물 나자렛 예수라는 분의 부활은 스스로 무덤에서 피가 돌고 숨을 쉬기 시작하고 체온을 되찾아 살아나온 부활이 아닙니다.
성경의 ‘부활(희:Egersis)’ 이란 동사는 피동태입니다. ‘스스로 일어나다’가 아니라 ‘일으켜지다’, 무엇인가에 의한 부활입니다.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일으켜 졌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한 것’이 아니고 ‘부활 받은 것’입니다.
부활이나 승천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속하며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몸부림을 모두 알고 계시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하느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이 하십니다.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반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완전 무력(無力)의 상태에 빠지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바로 하느님께서 움직이고 일하시는 시간이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은 반대자들이고 마지막 가는 길 무덤에 묻은 것은 제자들이지만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부활은 주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밖에는 방법도 묘수도 없을 때 그 분께서 움직여주십니다. 무릎 꺾인 이들에게 부활은 은총으로 일으켜 지는 부활입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을 ‘아나뷤’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는 사람들 이란 뜻인데 대표적인 인물이 나자렛의 마리아 요셉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역사가 그들을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이었지요. 그런데 다시 그리스도를 빼앗긴 것입니다.
경제 정치 사회적인 일은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한계가 있지요. 그렇지만 아나뷤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인정을 나누는 일은 마음만으로 가능합니다. 마음 하나 만으로..!
내가 사업에 실패하고 명예가 쳐박혀 죽게 되어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없는데, 아직 나에게 사랑하고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다는 현실이 바로 부활이 일어나는 빈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남아 있고 여러분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십시오.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