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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염치(禮義廉恥)가 살아있는 사회

by 박인수 posted Jul 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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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염치(禮義廉恥)가 살아있는 사회

나라가 망하는데 길이 있는가? 분명 있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망하는가? 지도자가 정도를 벗어나고 만백성이 그 지도자를 본받아 정도를 벗어나면 그 나라에는 망할 조짐이 나타나고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망국의 조짐을 7가지 사회악을 통하여 예견하였다.

 

첫째, 원칙 없는 정치이다. 모름지기 정치는 국민에게 사회구성체 유지를 위하여 올바른 원칙을 제시하고 원칙을 올바르게 고수하여야 한다. 공자가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 말한 ‘정치는 백성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지도자가 올바르면 누가 감히 올바로 따르지 않을 것인가!(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라는 말이 바로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오늘의 한국사회가 도덕불감증에 빠진 것은 오랜 기간을 통해 정치가 ‘올바름’에 대한 원칙에서 벗어난 때문이다.

 

둘째, 노동 없는 부()이다. 경제학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육체적 혹은 정신적 노동을 투입한 결과로 나타나는 재화가치는 모두 부의 범주로 본다. 노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인간의 행위로 노동은 본질적으로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어 노동은 본래의 신성한 가치를 잃어 버렸다. 너나없이 오직 어떻게 하면 노동투입 없거나 혹은 투입의 최소화로 부를 극대화하는가에 몰두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불로소득을 바라는 곳에는 온갖 불법과 부패가 난무하여 타락하고 부정과 술수가 신성한 노동을 대체하였다.

 

셋째, 양심 없는 쾌락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치의 하나인 쾌락 그 자체는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이 가지는 이성과 마찬가지로 쾌락도 인간이 동물과 다른 본질적인 속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동양의 옛 성현이나 서양의 철학자들도 ‘희(=Pleasure) (=wrath) (=sorrow) (=entertainment)’을 누리고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다만 과도하고 지나치지 않게 절제할 줄 알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절제한다함은 바로 양심이 살아있는 놀이방식이다. 요사이 사회에서는 쾌락에 도덕과 양심이 사라져버렸다.

 

넷째, 인격 없는 교육이다. 이것은 지금 한국에서 정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의 정상화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없다.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교육으로 나라를 세운다는 ‘교육입국(敎育立國)’의 모토로 근대화에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바로 한국이다. 그런 한국이 지금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지식도 인격도야와 수양을 추구하면서 습득하는 것이어야 되며, 인성 교육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직 목표지상주의와 효율만 강조하는 교육방식에 치중하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고 나머지는 이것에 따르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섯째, 도덕 없는 상업이다. 상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행위이다. 이윤추구를 나무랄 수는 없고 정당한 이윤추구는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한다. 다만 상업에도 건전한 상도의와 사회적 책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것을 무시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부만을 축적하는 상업은 사회를 타락시키고 병들게 한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건전한 상도의는 사라진지 오래고 도덕성은 없고 퇴폐적인 천민자본주의가 활개를 친지가 오래다.

 

여섯째, 인간성 없는 과학이다. 과학의 주체는 인간이며, 과학이 발달하여 누리게 되는 혜택도인간이 주체가 되어야 하나다. 신학이 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을 위한 것이듯이 기술이나 과학도 인간을 위한 것이다. 기술과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인은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매사에 인간의 주체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대학에서 인문학 분야가 젊은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잃고 기피하는 현상은 인류의 암울한 장래를 알리는 서곡이다. 인간성 없는 과학은 인간을 또 하나의 기계를 조작하는,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일곱째, 희생 없는 종교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자 뜻대로 종교(=으뜸 종, =가르칠 교)는 세상의 으뜸가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종교는 아주 타락하여 종종 뭇 사람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 까닭을 추적해보면 모두 각 종교의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에서 연유한다.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욕 물욕 때문에 정신이 해이해진 까닭이다. 종교가 앞장서서 부를 축적하는 행위도 자주 접한다. 종교 지도자들이 살을 깎는 자기희생에서 바람직한 종교의 회생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일곱 가지 망국조짐 사회악은 간디의 무덤 비석에 새겨진 글이라고 하는데, 하나같이 오늘의 한국사회가 처한 현상을 지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망국의 조짐이 만연하다고 볼 수 있다.

 

관중(管仲)은 춘추시대 중국의 정치가이다. 그는 제()나라 환공(桓公)을 도와서 당시 어지럽던 중원의 천하질서를 바로 잡도록 보좌한 인물로 ‘관포지교(管鮑之交)’ 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다. 그의 저술인 관자(管子) 서의 목민(牧民) 편에도 망국의 조짐을 지적한 대목이 있다.

 

“대저 나라를 묶어세우는 네 가닥 동아줄이 있다. 첫째는 예()이고, 둘째는 의()이며, 셋째는 염()이고, 넷째는 치()이다. (........ 國有四維, 一曰禮, 二曰義, 三曰廉, 四曰恥)

“예의염치는 나라의 네 가닥 동아줄인데 동아줄이 튼튼하지 않으면 나라는 곧 멸망한다.(禮義廉恥, 國之四維, 四維不彰, 國乃滅亡)

 

()란 무엇인가? 고대 중국에서의 예는 광의적인 의미와 협의적인 의미로 나누어진다. 광의의 뜻은 사회제도 풍속 습관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것이다. 협의적인 의미는 정치제도와 법률조직등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체계이다. 오늘날의 정의로는 법원에서 강제할 수 있는 사회의 규범적 법질서이다. 지금 한국의 법질서는 어떠한가? 지켜지는가 안 지켜지는가? 안지켜진다면 누가 먼저 안 지키는가? 바로 정치지도자와 법을 만드는 입법부(국회)에서 국민에게 본을 보여준 결과가 아닌가. 그것이 어제 오늘 하루 이틀 만에 나타난 결과가 아님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강자에게는 무의미하고 약자에게만 강요되는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사회적 정의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국가에서 사회적 정의는 한 순간이라도 무너질 수가 없다. 무너진다면 그것은 도덕적 정치공동체가 아니고 약육강식의 ‘자연상태’(state of nature)인 것이다. 현재의 한국이 처한 상황은 과연 사회적 정의가 살아 있는가? 강자와 가진 자의 독과점적이고 일방적인 무대에 가깝지 않은가 한번 되돌아보고 심각하게 반성할 일이다. 갖지 못한 다수와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의 설 땅이 있는가. 이들 계층 간에는 심한 불균등에 처한 것이다. 심화되어 가는 불균등은 사회불안을 불러오고 그것을 방치하면 최후 종착지는 빈민대중의 혁명이 될 것이다.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적이나 공공적인 분야의 정직성을 의미한다. 즉 공직을 맡은 사람들의 청렴을 뜻하는 것이다. 공직자가 청렴결백하지 못하면 공직자가 일차로 가져야할 덕목인 정직성에 큰 손상을 주는 것이다. 공직자가 청렴하지 못하면 속담의 말대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부터 대통령이 공직자의 청렴결백을 강조해 왔으나 아직도 요원하다. 날이 갈수록 오히려 공직자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조직적으로 더 은밀하고 교묘해지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느낌이다. 청백리(淸白吏)란 말이 사라진지 오래다. , 슬프다! 청렴한 공직자가 무능한 인물로 비쳐지는 오늘의 현실이.

 

()란 무엇인가? 이것은 옳지 못한 행위나 타인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수치심을 말한다. 그런데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대하여 아무런 수치심(sense of shame)을 느끼지 않는다는 데에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할 행동을 해놓고 오히려 화를 내거나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다반사처럼 되어버렸다. 거국적으로 도덕불감증과 공공윤리 실종이 만연하여 그야말로 짐승들의 야수상태와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거리를 걷다보면 공공질서와 예절을 태연하게 무시하는 시민이 이렇게 많은가 놀랄 때가 많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간디 무덤의 비석에 새겨진 7가지 사회악과 관중의 나라를 묶어세우는 네 가지 동아줄을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당장은 힘들겠지만 힘 든다고 손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려있는 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동의할만한 내용이다. 그럼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정치지도자의 태도와 결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을 저지르고도 남이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내가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라고 우긴다. 매번 정권교체기 때마다 등장하는 대통령 직계 친인척 구속이 기어이 이번에도 재연되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개판 나라가 되어 버렸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원칙에 충실한 정치지도자를 뽑는 일이다. 우리가 ‘하지 않을 뿐이지, 할 수가 없어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不爲也, 非不能也)’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강조한 공자의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그대가 먼저 정직하고 올바르다면 누가 감히 올바로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子帥以正, 孰敢不正)

 

박 인 수

 

201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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