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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2.05.21 19:24

스쳐지나간 잊혀지지 않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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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지나간 잊혀지지 않는 인연

 

 

서태평양상의 고구마처럼 생긴 섬인 타이완(臺灣=대만)에는 해발 3천 미터가 넘는 높고 험준한 산맥이 태평양을 연해 남북으로 뻗어있고, 산속에는 9개의 원주민 부족들이 2천년이 넘게 흩어져 조상대대로의 전통적 방식으로 살고 있다. 타이완의 원주민인 고산족(高山族)들이 사는 마을을 고산족이 아닌 사람이 방문하기 위해서는 내무부 경정서(警政署)에 입산허가를 받아야 한다. 지금은 고산족이라도 도시로 내려와 생활하는 이들이 많고, 자녀가 학교에 가면 정부는 특별장학금을 준다.

 

타이페이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우라이(烏萊)라는 고산족 마을의 깊은 산속에서 살던 어느 한 한국인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고산족 마을에서도 한참 더 떨어진 산속 외딴 집에서 부인(고산족 여인)과 자식도 없이 산속에서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얼굴은 평화롭고 약간 체념적인 표정이었다. 달리 보면 또 세상사에 욕망과 욕심이라고는 없는 만사 달관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를 1986년도 가을 즈음에 처음 만났고, 그때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초로(初老)의 인상이었다.

 

그는 태어난 고향이 북한이라는 말만 하고 다른 말은 아껴 했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 때 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반공포로석방 때 풀려난 그에게는 남쪽도 고향이 될 수 없었고, 공산당 치하의 북녘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3국을 선택하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타이완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는 동화 속의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부인은 대부분의 고산족 처녀들처럼 무학(無學)일 것이고, 오직 남편을 위해 밥 짓고, 빨래하고, 부부간의 애정을 나누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산골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부는 우리 일행이 방문하자 너무나 반가운 눈치였다. 그녀는 귀한 손님을 위해 겨우내 갈무리 해두었던 음식을 꺼내 정성껏 요리를 해주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처럼 고산족들은 사냥해온 짐승의 내장을 꺼내고 몸통은 소금에 저미어서 땅을 파고 묻어서 저장해 둔다. 뉴질랜드 마오리와 타이완 고산족은 DNA 조사에서 95%가 일치한다는 보고서를 읽은 기억이 난다.

 

나는 타이완에서 유학생활을 할 동안에 두 번 그 분을 방문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담소하면서 담뱃재털이에 꽁초가 하나만 놓여도 옆에 앉아있던 부인은 얼른 재떨이를 비워서 가져다 놓곤 하였다. 바늘과 실처럼 부인은 남편 주변을 떠나지 않고 세심하게 살피며 깔끔하게 정리하였다. 그는 도시로 나갔다가 번잡하고 시끄러워 도저히 못살고 다시 산속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에게 한국이나 고향 친지생각 등과 같은 단어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상처가 얼마나 깊을까? 얼마나 상처가 깊으면 깊은 산속에서 고산족 여인과 외롭게 단 둘이서 살아갈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는 타이완을 떠나면서 이들 부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였다.

 

1999 11월 말, 길거리에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파리의 몽마르뜨언덕을 여행할 때였다.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두 사람뿐이었다. 그때 우리는 와이카토 대학교 정치행정학과를 대표하여, 독일의 만하임(Mannheim) 대학교에서 개최된 유럽합동정치학회(European Consortium for Political Research, 약칭 ECPR) 연례학회에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한 후 관광에 나선 길이었다.

 

몽마르뜨 언덕을 관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덕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오면서 관광을 한 후 올라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가는 듯하였으나, 우리는 올라왔던 언덕의 반대편 내려가는 길로 한참을 더 걸어가 보았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던 차에 적당한 생맥주집이나 카페를 찾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때 마침 카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때는 오후의 어중간한 시간이라 손님은 별로 없었고 곧 주문받는 여자아이가 왔다. 아시안 얼굴을 한 어린 아가씨는 생김새가 트기이었다. 맥주를 한잔씩 주문하여 마시면서 얘기하고 있는데, 주방 안에서 주인인 듯한 남성이 우리를 지켜보더니 이윽고 다가왔다. 그는 우리들의 대화를 듣다가,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그의 안태(安胎) 고향은 강원도 어디라고 했다. 요즈음은 모두 병원에서 출생하니까, 태어날 때 엄마 몸에서 나온 태()를 묻을 장소도 없고 따라서 안태고향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다.그의 한국에서 최종학교는,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경남의 통영수산전문학교였고 학교를 졸업하고 외항선을 탄 것이 벌써 삼십 년 전이라고 말했다. 고향에 부모님도 살아계신다고 했지만 그는 고향을 방문하지 못한 것도 삼십 년째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는 필경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겠지만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가 탄 선박은 대서양의 라스팔마스에 어항기지를 두었고 그는 뱃사람 생활을 했으나 너무 지긋해서 몰래 하선한 후 전전하다가 프랑스로 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파리에서 베트남 여성을 만나서 결혼하였다고 했다. 아까 맥주주문 받은 여자아이는 그의 딸이고, 파리에서 치과대학을 다니면서 시간을 내어 아빠가게 일을 도와준다고 했다. 딸아이가 졸업하고 치과의사가 되어 개업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딸아이는 아빠와 낮선 손님이 모처럼만에 한국말로 얘기 나누는 모습을 신기한 듯이 저 멀리서 엿보고 있었다. 우리가 다음 여행지를 위하여 일어서려고 하자 그는 조금만 더 앉아 있다가 가라고 애원조로 말했다. 순간 그의 처지가 애처로운 느낌이 들어 일어서던 발걸음을 거두고 다시 앉았다. 그는 딸아이에게 프랑스어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더 가져오라고 일렀다. 평소 얼마나 한국 사람이 그리웠을까........ 마음 한편으로 그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참을 더 앉아서 얘기 나누다가 우리가 한국이 아닌 뉴질랜드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참 신기하다는 듯이 뉴질랜드에 관해서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우리도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결국 떼어서 일어나 헤어졌다. 작별인사를 나눌 때 그에 얼굴에는 헤어지는 것을 섭섭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나는 그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기를 비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이들과는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났던 초로의 한 한국인도 나의 기억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는 1960년대 초기의 ‘파독광부’ 즉 독일로 파견된 대학졸업생 광부였다. 그는 간호사로 독일에 온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고, 아들은 유럽의 명문인 스위스의 취리히 공과대학에 다닌다고 자랑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두 분의 경우와는 달리 이 분의 경우 한국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음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최소한 먹는 음식에서나 잠자리에서 나눌 대화에서 민족적 정서의 공통부분이 있으니까 말이다.

 

당시 국내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하던 그 분들이 독일에서 피땀으로 일해서 송금한 돈으로 대한민국이 오늘의 기적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늘고 길게 주름진 그의 이마와 얼굴에서 그가 젊어서 한 육체적 고생과 마음의 애환 자국을 나는 읽을 수가 있었다. 자동차로 4시간이나 걸리는 함부르크에까지 가서 생선 횟감을 마련해 놓을 테니, 다음날 식당에 꼭 다시 들르라고 하던 그 분의 호의로부터 나는 진한 동포애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외롭게 살아가던 그 때 그 분들이 가끔씩 생각난다. 나 자신도 태어난 고향과 고국을 떠나 오랜 해 동안 해외를 유랑하면서 살아서인지 몰라도, 그 때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나도 그분들과 본질적으로 동류의 인생을 사는 같은 처지라 생각한다.

 

‘이 풍진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운행할 수 없음(人在江湖 身不由己)’ 때문이리라.

 

박 인 수

201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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